3-01. 화장실에서 읽는 시   1997 년
 

 1997년 3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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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 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오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게시기간 : 1997년 12월28일∼1998년1월3일) 039 릴리(Lily)의 기도 김휘 주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착히 살아가게 하소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생활이 내 앞에 놓여진다 해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게 하소서 비록 가진 것이 부족할지라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내게 주시옵고 주님의 은총에 항상 감사드리며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게시기간 : 1997년 12월21일∼12월27일) 038 사랑하면 바보가 되는 거니? 바보인 척 하는 거니? 허재형 해를 보고 달이라고 부르면 달이되고 달을 보고 해라고 말하면 해가 돼. 너의 말은 내게 진리로 통하고 너 외에는 내게 중요한 것이 없어 사랑하면 바보인 척 하는 게 아니라 바보가 되는 건가 봐 한가지만 봐도 알 수 있어 바람맞힌 너인데도 너의 전화 한 통화에 화를 내기는 커녕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날 보면 (게시기간 : 1997년 12월14일∼12월20일) 037 나 그대에게 최유진 힘들어 하는 그대를 포근함으로 감싸 주는 그런 친구이고 싶습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는 그런 사이이고 싶습니다. 한 때의 행복보다는 영원함을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진실이고 싶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그대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고 싶습니다. 그대를 알아 감으로써 내가 살아있음도 느끼는 그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게시기간 : 1997년 12월7일∼12월13일) 036 너는 우정이라 하고 나는 사랑이라 한다. 최복현 만남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을 이해해 줄 수만 있어도 좋다. 외로울 때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그 누구라도 좋다 그러나 너는 말한다. 만남의 의미보다 사랑이 커지면 이별의 고통이 뒤따른다고 고통스런 줄다리기를 해야 할 사랑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말한다. 나눔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의 뜻이라고 (게시기간 : 1997년 11월30일∼12월6일) 035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이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게시기간 : 1997년 11월23일∼11월29일) 034 내가 널 좋아하는 건 한소라 얼굴이 잘 생긴 게 아님 어때서, 그렇게 못 생긴 얼굴 절대 아냐 키도 크지 않으면 어때, 나도 안 크잖아 어깨 안 넓으면 어때서, 내 어깨도 좁잖아 상하 비율이 좀 틀리면 어떠니, 내가 팔등신이라면 몰라도 학벌이 무슨 상관이야, 하고 싶은 일이 있음 됐지 핸드폰이나 자가용 같은 거 없어도 돼, 공중전화가 있고 버스가 있잖아 난 그냥 네가 너이기 때문에 좋은 거야 날 이해해 주는 그 넓은 마음 하나로 내 안에 머물기에 충분한 거야 그 대신, 너도 꼭 나만 좋아해야 돼 (게시기간 : 1997년 11월16일∼11월22일) 033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화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게시기간 : 1997년 11월9일∼11월15일) 032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 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시기간 : 1997년 11월2일∼11월8일) 031 울음이 타는 가을 강 (江) 박재삼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 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녁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 보다도 나 보다도 그 기쁜 첫 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게시기간 : 1997년 10월26일∼11월1일) 030 Give 보단 Take가 더 효과적이래 조하경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을 땐 무조건 주는 것 보다는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해봐 책을 빌려 보는 것도 괜찮지 빌릴 때 한번 돌려 줄 때 한번 적어도 두 번은 만날 수 있잖아 가끔은 피할 수 없는 핑계를 만들어 술 한잔 사달라고 조르기도 해 보고 한잔 사겠다는 호의를 사양하는 건 쉽지만 사달라는 걸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을 걸 그가 잘하는 무언가를 가르쳐 달라고 해도 좋을거야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건 어쩜 그가 원하는 일 인지도 몰라 무언가 그 사람이 부담없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도 한번 쯤 해 보고 사람은 무언가를 받을 때 보다 자신의 무언가를 해준 사람을 더 인상적으로 기억한대 (게시기간 : 1997년 10월19일∼10월25일)

 

              029   노을   이동진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 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짓고
              초가 지붕 둥근 박 꿈꿀 때
              고개 숙인 논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 바람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 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 놀

              (게시기간 : 1997년 10월12일∼10월18일)



              028   지금   작가미상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이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기에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보여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게시기간 : 1997년 10월5일∼10월11일)



              027   가을   조구자

              뜨락 가득히
              물빛 하늘이 고이면
              나는
              고운 감처럼
              마음속 호롱에 불을 켭니다.

              깨달음으로 몸을 태우듯
              명상의 시간에
              다가서는 혼이여

              빈 마음으로, 홀가분한
              의지의 날개로
              햇살을 안아 승천하는
              이슬을 배우고 있습니다.

              낙엽이 부딪쳐 오는 소리에
              어여쁜 눈물이 도는
              고독 앞에
              해맑게 상기된 물결은
              머문 듯 잔잔히 흐릅니다.

              (게시기간 : 1997년 9월28일∼10월4일)



              026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용해원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잠시라도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기쁠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날마다 언제나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은
              지상에서 영원까지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지상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이여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게시기간 : 1997년 9월21일∼9월27일)



              025   하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게시기간 : 1997년 9월14일∼9월20일)



              024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게시기간 : 1997년 9월7일∼9월13일)



              023   코스모스를 노래함   이기순

              달 밝은 하늘 밑 어여쁜 네 얼굴
              달나라 처녀가 너의 입맞추고
              이슬에 목욕해 깨끗한 너의 몸
              부드런 바람이 너를 껴안도다
              코스모스 너는 가을의 새 아씨
              외로운 이 밤에 나의 친구로다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고요타
              내 마음 더욱 더 적막하여 지니
              네 모양도 더욱 더 처량하구나
              고요한 이 밤을 너 같이 새려니
              코스모스 너는 가을의 새 아씨
              외로운 이 밤에 나의 친구로다

              (게시기간 : 1997년 8월31일∼9월6일)



              022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게시기간 : 1997년 8월24일∼8월30일)



              021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게시기간 : 1997년 8월17일∼8월23일)



              020   강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게시기간 : 1997년 8월10일∼8월16일)



              019   서러운 강   박용삼

              8월 한낮의 지는 더위쯤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은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나로 하여금 어떻게
              이 무더운 여름날의 밤을
              혼자서 처리하라 하는가
              내 주위를 머물다 떠난 숱한
              서러운 세월의 강 이쪽에서
              그리운 모든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밤이 찾아오는 것만은 죽음처럼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8월의 무더위 속에 나를 던져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하게 하라.
              빈 들에서 부는 바람이 되어
              서러운 강이 되어……

              (게시기간 : 1997년 8월3일∼8월9일)



              018   가고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 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 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 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 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차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 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게시기간 : 1997년7월27일∼8월2일)



              017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빛나는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따스한 가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지와 잎, 뿌리까지 모여서
              살아있는 나무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대 뒤에 서 있는 우울한 그림자,
              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내게 전부로 와 닿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완벽하게 베풀기만 했다면
              나는 그대를 좋은 친구로 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는 나에게
              즐겨할 수 있는 부분은 남겨 두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이 될 수 있었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게시기간 : 1997년 7월20일∼7월26일)



              016   복종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게시기간 : 1997년 7월13일∼7월19일)



              015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여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게시기간 : 1997년 7월 6일∼7월12일)



              014   갈망   유창섭

              너를 가두어 두리라
              가슴 깊은 비밀 있는 곳
              따뜻한 샘이 솟는
              그런 마음의 들판에
              너를 있게 하리라

              생각이 나는 때
              보고 싶은 때는
              아무 제약없이 자유로이
              가슴 채워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곳에 너를 있게 하리라

              깊은 가슴에 나를 채우고
              슬픔도 걱정도 쓸어내어
              나누는 이야기에 지침이 없도록
              깊은 그물 안에 너를 가두어 두리라.

              (게시기간 : 1997년 6월29일∼7월5일)



              013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게시기간 : 1997년 6월22일∼6월28일)



              012   옹달샘   윤석중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 하다가,
              목 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가지요.

              (게시기간 : 1997년 6월15일∼6월21일)



              011   사랑하고 싶다   황금찬

              사랑의 눈으로 보면
              사랑스럽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아직도 남을 미워하고 있는 것은
              내 눈이 사랑의 눈으로
              변모되지 못했다는 증거다.

              장미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

              잎이 성하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까지도
              사랑하고 싶다.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영혼의 눈을 갖고 싶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

              (게시기간 : 1997년 6월8일∼6월14일)



              010   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 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 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에 외롭고 고단함
              그대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게시기간 : 1997년 6월 1일∼6월 7일)



              009   기다림   모윤숙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 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 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강 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추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안으려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게시기간 : 1997년 5월 25일∼5월 31일)



              008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게시기간 : 1997년 5월18일∼5월24일)



              007   모란이 피기까지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은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살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게시기간 : 1997년 5월 11일∼5월 17일)



              006   푸른 오월   노천명

              청자 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앞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매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흔닢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 !

              (게시기간 : 1997년 5월 4일∼5월 10일)



              005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게시기간 : 1997년 4월 27일∼5월 3일)



              004   내 마음은   김동명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귀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의 그대의 뜰에 머므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게시기간 : 1997년 4월 20일∼4월 26일)



              003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게시기간 : 1997년 4월 13일∼4월 19일)



              002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게시기간 : 1997년 4월 6일∼4월 12일)



              001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게시기간 : 1997년 3월 31일∼4월 5일)


3-01. 화장실에서 읽는 시 1997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