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23 년
 

   2023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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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새해 다짐 정미형 새해만 되면 삼백예순다섯 날이라는 선물을 누구나 할 것 없이 공평하게 받지 들여다볼 때마다 도둑맞은 듯 쑥 쑥 줄어들어 허망하기 그지없더라 올해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겠어 열심히 일하고 욕심껏 사랑하고 기어이 건강할 거야 (게시기간 : 2023.12.31. ~ 2024.01.06.) 1392 크리스마스를 위하여 김시태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희미한 고향집과 어머니 그 개구쟁이들 그들을 도로 돌려주소서 조그만 카드 속에 정성을 담던 그 소년들도 돌려주소서 첫 아이 보았을 때 기도 드리던 그 아빠와 엄마도 돌려주소서 아이들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성당을 찾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한 번 더 그 종소리 듣게 하시고 눈 내리는 아침을 걷게 하소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소서 (게시기간 : 2023.12.24. ~ 12.30.) 1391 북어 허림 오래 묵으면 묵을수록 단단해지는 생이 있다 오래 묵을수록 장작개비처럼 썩지 않는 말이 있다 광 바람벽에 걸어 둔 북어 할 말 많아 아직도 다물지 못하는 당신, 그 속에 걸어 둔 말들 그렇겠다 말도 쌓이면 돌처럼 단단해지는 것인데 얹힌 듯 답답하다는 말이 그럴 것이고 죽이라느니 지긋지긋하다느니 부대끼며 살아온 마음 바람벽을 바라보다가 비쩍 마른 북어를 꺼내 퍽퍽 두들겨 팼다 날은 자주 흐렸지만 눈이 오지 않는 섣달 겨울이었다 (게시기간 : 2023.12.17. ~ 12.23.) 1390 가슴 빈터에 따뜻한 그리움을 심으리라 양애희 슬프다 하여 그대여 울지 마라 외롭다 하여 그대여 슬퍼하지 마라 흰 눈이 가슴 안으로 마구 휘날린다고 하여 지나온 시린 발자욱 마구 지우려 또 애쓰지 마라 저문 날들이 하루를 지우고 떨어진 낙엽들이 추억을 떨치고 상처 깊어 꽃잎같이 가녀린 줄 터진 그리움이 마구 흔들린다 해도 그대여, 바람 곁에서 꿋꿋히 버티자 한 가닥 희망이 길게 구부러져 허공에 제멋대로 나부낀다 하여도 호올로 가야할 삶이라면 지붕위에 덧댄 지난겨울의 기와 한 장이 되어도 좋으리 삶이란 뜨락에 너와 나 함께 동행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몇 포기 별로 뜬 행복을 담방담방 떠서 아직도, 슬픈 네 가슴 빈터에 내 따뜻한 그리움을 심으리라 (게시기간 : 2023.12.10. ~ 12.16.) 1389 겨울비 신순균 다사다난했던 길목에서 한 해를 접는 어느 날 비가 내린다. 지난날을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가을은 가고 벌써 겨울이 온다. 겨울에 내리는 비 밭에도 산에도 대지 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내린다. 메마른 마음에 내린 비 때문에 오늘을 정리하고 내일을 다시 연다. (게시기간 : 2023.12.03. ~ 12.09.) 1388 하늘에 걸린 시계 박해경 할머니 큰방 벽에 걸린 시계가 잔다 “그냥 놔두라 좀 쉬구로 지는 언제 쉬어 보겠노” 할머니는 시간 어떻게 알려고 그라노 “하늘에 걸린 시계 보면 되지, 모내기 하소 콩 심으소 장 담그소 김장하소 팥죽 끓이소 하늘에 걸린 시계가 알려주는 대로 살다 보니 참 바쁘게 살았는기라” (게시기간 : 2023.11.26. ~ 12.02.) 1387 행선(行船) 권자미 뻥이요! 터지는 알갱이 딱딱하던 속엣것이 부드러워졌다 양말장수 도넛장수 씨앗장수 하루가 콩낱같이 튄다, 뻥이요! 딱딱한 속 펑 소리나게 뚫려 한 열배쯤 기운차게 살자고 호떡장수 좀약장수 번데기장수 고무줄장수 밑져야 본전 깎아 주고 얹어 줘도 오그랑장사는 없어 마수걸이 지폐에 침부터 뱉고 보았다 그저 그런 날도 튀겨 놓으면 한 포대 됫박도 공갈같이 광주리 반 드러내놓고 왁자한 이 바닥 내력, 뻥이요! 안동 오일장마당 떠나갈 듯 소란스럽다 당연하지 않는가 사는 일이 이만큼 분주하지 않고서 저녁상을 어찌 차리랴 (게시기간 : 2023.11.19. ~ 11.25.) 1386 혼자서 기다리는 정대호 가끔은 오지 않는 사람을 한 없이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걸 생각지 말고 오늘도 그냥 책상에 앉아 가난한 편지를 쓰며 그 가난한 마음으로 가슴 따듯해질 수 있다면 가끔은 마음 한 곳이 텅 비어 있어 누군가 와서 채워주지 않으면 마음 아파할 때가 있지 혼자서 산길을 걸으며 누군가 옆에 그림자 하나쯤으로라도 서 있었으면 하는 때가 있지 가끔은 나도 창가에 앉아 마냥 기다리고 싶을 때가 있지 오지 않아도 올 것만 같아도 올 것 올 것 올 것만 같아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 (게시기간 : 2023.11.12. ~ 11.18.) 1385 자갈치시장에서 서형오 바닷물이 수억만 번도 넘게 대패질을 한 자갈밭 자리에 왔다 자갈치시장 사람들은 저마다 해풍과 햇볕에 널려서 짭조름히 간이 올랐다 줄금이 숱하게 터진 도마 위에는 물 숲에서 뭍으로 적선을 하러 나온 생선이 배가 도드라지게 누웠고 식당 주인이 뚝뚝이 비늘을 벗겼다 저 비린 것에게도 먼먼 조상이 있어서 바다는 해달별 아래에 편편히 앉아 곤한 날은 껌벅이기도 하면서 한 땀 한 땀 비늘 옷을 지었겠다는 생각이 돋았고 저것도 조상을 따라 선한 사람이 차린 옹골진 밥상 위에 모로 누워서 젓가락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 왔다 (게시기간 : 2023.11.05. ~ 11.11.) 1384 장미요양원 박권수 거긴 나이가 몇이슈 햇살 하나가 창을 넘어온다 뭐 먹을 만큼 먹었쥬 근데 거기는 유 음 나도- 고만고만한 햇살 서너 개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있다 따사로움이 묻어날 때마다 반사된 햇살은 자리를 뜨곤 했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서로의 어깨들이 더 자주 더 가깝게 다가간다 햇살들이 모여앉은 창가에 거긴 여긴, 여긴 거긴 서로가 서로에게 토닥이는 소리 저마다의 거리에서 그냥 말걸기 편한 어이 거기, 나이가 몇이슈 햇살 하나 또 건너와 손을 내민다 서로의 나이를 묻는 일 일상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햇살이 자리를 떴다 (게시기간 : 2023.10.29. ~ 11.04.) 1383 해거리 김지란 고구마 캐는 날 하늘 한번 보고 윤슬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에 홀려 서툰 호미가 게으름을 부린다 이 늦은 가을 밭고랑 가장자리 철없는 배나무 가지마다 봄이 한창이다 지금 꽃피면 내년 봄엔 어쩌나 친정아버지 언제 곁으로 오셨는지 “놔둬라 해년마다 잘 따먹었응께 내년 한 해 푹 쉬라고” (게시기간 : 2023.10.22. ~ 10.28.) 1382 채송화 꽃씨 공재동 채송화 꽃씨를 딴다. 지구에는 아직도 이렇게 작은 꽃씨가 있어 여름 내내 예쁜 꽃을 피우는데 햇살 고운 이 가을 조심조심 네 작은 꽃씨를 딴다. 작아서 미운 것이 어디 있으랴. 채송화네 작은 꽃씨를 딸 때면 세상사는 일이 참 조심스럽다. (게시기간 : 2023.10.15. ~ 10.21.) 1381 인생은 그런 거더라 김종구 이 세상 살다 보면 어려운 일 참 많더라 하지만 알고 보면 어려운 것 아니더라 울고 왔던 두 주먹을 빈손으로 펴고 가는 가위 바위 보 게임이더라 인생은 어느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거더라 내가 홀로 가야할 길 인연의 강 흘러가는 알 수 없는 시간이더라 쉽지만 알 수 없는 인생은 그런 거더라 (게시기간 : 2023.10.08. ~ 10.14.) 1380 그대 나의 별이 되어주세요 박현희 누구나의 가슴속에는 삶의 등불이 되어줄 아름다운 별들 하나씩 품고 살아가지요. 꿈과 희망을 주는 별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는 별 강인한 의지와 인내를 주는 별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면 매우 크나큰 기쁨과 축복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 나의 별이 되어주세요. 무수히 많은 별 가운데 오직 나만이 바라보며 우러를 수 있는 아름다운 나의 별이 되어주세요. 내 삶의 등불이 되어줄 그대가 있어 참으로 살맛나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사랑스럽고 멋진 그대 내 가슴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나만의 영원한 별이 되어주세요. (게시기간 : 2023.10.01. ~ 10.07.) 1379 추석은 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게시기간 : 2023.09.24. ~ 09.30.) 1378 우산 박치성 우산 속 우리 둘만의 우주에서 당신의 어깨를 감쌀 수 있다면 내 한쪽 어깨는 조금 젖어도 괜찮아요. 난 당신을 향한 마음만 차가운 비에 젖지 않으면 됩니다. 아, 물론 젖는다고 이 뜨거운 마음이 식을 리는 없습니다만. (게시기간 : 2023.09.17. ~ 09.23.) 1377 슬기로운 등산법 곽은지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새침한 산새는 휙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나무도 한 번 지나가는 이에게 이야기를 걸지 않는다. 여러 번 걷고 가만히 보는 자에게만 보이는 길 새의 노랫소리 얽혀있는 나무의 포옹 꽃의 향기 바람결에 스치우는 풀 그리고 걸음마다 들리는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게시기간 : 2023.09.10. ~ 09.16.) 1376 웃음 박소란 나는 요즘 웃음이 부쩍 늘었습니다. 웃음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습관이 중요합니다. 텔레비전은 어디에나 있고 개그맨은 언제나 등장합니다. 느닷없이 나둥그러지고 느닷없이 자지러져 그런 걸 보면서 밥을 먹지요. 두 그릇씩 꼭꼭 먹지요. 정신없이 수저를 놀리다 보면 미처 발라내지 못한 한 조각 날 선 비애가 무른 잇몸에 불쑥이 들어박히기도 하지만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웃음은 부쩍 늘었습니다. 웃음은 굳세고 웃음은 누구보다 영민하니까 웃음도 밥을 먹지요 두 그릇씩 꼭꼭 먹지요. 흑백의 화면 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가 내가 막춤을 추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은 자지러집니다. 빨개진 얼굴을 감싸 쥐고 바짝 마른 어깨를 들먹입니다. 조명이 꺼진 무대 모두가 퇴장한 뒤에도 웃음은, 나의 웃음은 혼자 깔깔깔 서 있습니다. (게시기간 : 2023.09.03. ~ 09.09.) 1375 쌀밥 조남명 먹고 살기 힘들던 쌀밥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시절 밥사발엔 고구마, 감자 덩어리 그것을 빼 먹으면 동굴이 몇 개 뚫린다 쑥과 무, 시래기를 넣어 쌀을 대신하고 보릿고개 꽁보리밥은 볼탱이 양쪽으로 몇 번씩 미끌어지고 명절 때나 고기 맛을 본 가난 밥이 힘이고 웃음으로 피었다 그게 한이 되어 지금도 성공이나 삶의 정도를 밥으로 말한다 누구는 밥 먹고 살만 하다든지 밥술이나 뜨고 살고 있다든지 이제 안 먹어서 못 먹는 쌀밥 먹을 것 지천인 세상 어렵게 살다 가신 부모님이 목에 걸린다 (게시기간 : 2023.08.27. ~ 09.02.) 1374 손빨래 유애선 손목이 찢어진 고무장갑 아들이 입던 청바지와 딸의 스커트를 손빨래 한다 이 얼룩 한 점 어디서 묻혀 왔을까 조심스럽게 비벼도 남아 있는 얼룩 어쩌면 내게 말하지 못한 눈물 같다 나는 얼룩을 힘주어 비빈다 한때는 품에 쏙 들어오던 아이들 언제 이렇게 자랐나 이 옷을 빠져나간 다리와 이 옷을 빠져나간 몸처럼 언젠간 내 품을 빠져 나갈 아직은 품안의 내 아이들 얼룩진 바지와 스커트에 햇살을 듬뿍 묻힌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라고 빨래집게 하나 물려준다 (게시기간 : 2023.08.20. ~ 08.26.) 1373 지친 친구에게 보내는 시 전진탁 여보게, 기분은 괜찮은가? 자네가 요즘 힘들다 해서 묻는 말일세! 문을 열고 나가서 세상을 한 번 보시게! 어떤가? 언제나 세상은 그대로이며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은가? 비가와도 눈이 내려도 광풍이 휘몰아쳐도 여전히 해는 뜨고 또 여전히 땅은 그대로 있으니 자네 가슴으로 불어와 꽁꽁 얼어버린 찬바람일랑은 저 햇살 아래에 서서 녹여 떠나보냄이 어떠한가? 어느 곳 어느 땅이건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네가 서 있다네 그러니 중심 잘 잡으시게 자네가 휘청거리면 세상이 거세게 요동친다네 자네 휘청거리면 나는 넘어지는 신세니 한 번 봐주시게 여보게, 세상의 중심! 그래, 자네 말일세! 자네가 태양을 집어삼킨 가슴으로 살기를 내 간절히 바라네 자네 식어있는 가슴을 지난날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다시 한 번 활활 태워보시게 힘을 내시게 내 응원함세 자네가 세상의 중심이잖은가! 자, 내 손을 잡으시게 다시 일어서서 저 태양을 집어 삼켜버리시게! (게시기간 : 2023.08.13. ~ 08.19.) 1372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현택훈 지구는 외로운 섬 우주는 드넓은 바다 낮과 밤으로 밀물 썰물이 오가는 섬에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섬사람 지구섬에서 출항한 탐사선들 달섬은 토끼도 없는 무인도였다 불섬에서는 물의 흔적이 발견되긴 했으나 소라게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중이다 태양계라는 이 대양에서 외로운 섬사람들은 우리뿐인가 우리는 아직 이 대양 밖을 나가진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립다 수평선 너머엔 다도해가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섬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 아닌지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섬들을 보라 가끔 외계의 섬에서 온 배를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그 배의 갑판에서 오후를 보내진 못했다 내 마음의 만(灣)에 정박해 있던 푸른 배 한 척 멀리 떠나 버린 뒤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곤 한다 소인은 해당화가 되어 주려나 바다로 가지 못한 채 모래 위에 핀, 한 생의 해당화 발을 딛는 곳마다 바닷가 불어오는 우주의 바람이 차겁다 (게시기간 : 2023.08.13. ~ 08.19.) 1371 말복 안영준 말복아 수많은 날 들을 왜 열받게 했나 어차피 갈 거였더라면 서둘러 가지 그랬어 말복아 너 그날 간다고 말이나 했다면 손꼽아 기다리지는 않았지 너 가니 시원한 바람 안고 칠석이가 급히 왔네 말없이 떠난 말복아 올해는 이름값 제대로 하고 갔구나 세월 행 타고 멀리 가는 네게 여비 한 푼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내년엔 시원한 바람 안고 와 다시 만나세 (게시기간 : 2023.08.06. ~ 08.12.) 1370 그 여름 밤 최경신 내 어릴 적 여름 뒤꼍 우물가에 목물할 땐 심장에 소름이 돋고 칼끝의 짝! 소리에 우물에서 건져 올린 수박에 서릿발이 서는 밤이면 하늘에는 별들의 잔치가 열렸었지 생풀 타는 매콤한 연기를 어머니의 부채바람에 날리며 앞뒷문 열어 제친 모기장 속의 단잠이 홰를 치는 새벽을 밀어내고 이슬 먹은 풀벌레 소리에 삼복도 맥 놓고 지나갔었지 열대야! 그 여름에는 이런 것도 없었는데 (게시기간 : 2023.07.30. ~ 08.05.) 1369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김완 세상에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이 사라졌다 그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 사소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렸다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들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맛깔나는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 알싸한 고향 바다 냄새를 토하며 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집도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도 사라졌다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를 향기롭게 하던 작은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구원과 위안은 미래의 원대한 것보다는 오늘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게서 온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동네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것이다 식당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바뀔까 (게시기간 : 2023.07.23. ~ 07.29.) 1368 달래에게서 배운 것 배창환 낯익은 산길 가다 찾는다. 달래, 며칠 전 바로 이 풀섶에 있었는데 찾을 수 없다. 누가 이 길을 지나갔나보다. 잘 보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뜯겨나간 허리에서 촉을 내어 비이슬에 멱을 감아 더 싱싱하게 새벽 햇살에 얼굴 닦아 더 싱싱하게 주위 풀들이 자라면서 너를 에워 감싸안고 숨겨주고 있다. 이대로 너는, 일년이라 열두 달을 하루도 없이 찬비 바람 뜨거운 해 서늘한 달을 받아들이며 다시 치열하게 한 생을 살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잠들어 있을 새봄에 지각을 흔들어 깨우며 가장 먼저 이 땅 위에 깃발을 들어올릴 것이다. 그러므로 견디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견디는 것이 힘이다. (게시기간 : 2023.07.16. ~ 07.22.) 1367 욕맛 정선희 아름답다는 말보다 귀엽다는 말이 좋아 귀여운 건 작은 꽃송이 같은 것 눈웃음처럼 사르르 마음을 녹이지 봉숭아꽃 물들이듯 마음을 물들이고 말지 딸기 다라이 깔고 앉은 저 할머니 떨이라 해놓고 손님이 가고 나면 또 꺼내놓는 할머니, 거짓말이 너무 귀여워 어제도 정구지 첫물이라 해놓고 오늘도 정구지 첫물이라 하네 아이구 새댁아! 겨울 지난 정구지 첫물은 사위도 안 주는 법이라 안카나 입에 녹음기라도 달아 놓았나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 입술에 침 발라 가면서 하는 거짓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거짓말 속는 줄 알면서도 사고 속아도 밉지가 않아 어제 팔다 남은 것 밑에 깔고 싱싱한 것 위에 얹는 것도 괘씸하지가 않아 안 사고 뒤적거리다 가면 뒤통수에 대고 한바탕 들이붓는 욕도 시원하기만 해 늙어도 욕맛은 싱싱하기만 해서 여름날 소나기처럼 시원하기만 해 (게시기간 : 2023.07.09. ~ 07.15.) 1366 나무가 말하는 법 송재학 나무는 무엇을 속삭이는가 꽃의 숨소리 공기의 숨소리 나무의 숨소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섞이고 있다 발자국을 감추는 데서 나무의 말이 시작되었다 바스라지는 가랑잎에는 나무의 말이 같이 흩어지는 중이다 무성한 잎새 속에서 나무의 말은 바람에 스며드는 게 익숙해졌다 나무라는 움직임에도, 삼(森)이란 글자에도 나무의 말이 건너가 있다 나무의 말이 죄다 음각화이니까 나무의 말은 점자가 우선이다 소리라 부를 공명통은 망각했지만 입을 닮은 귀의 흔적은 예민하게 남았다 나무의 말은 숲의 모든 그림자를 물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나무속으로 걸어 들어간 옹이를 더듬자 입말이 준비되었다 나무의 말은 숲의 소리 앞쪽에 있다 저 혼자 소리 내지 않는 말이기에 오래전 사람도 나무의 말을 배운 적이 있다 (게시기간 : 2023.07.02. ~ 07.08.) 1365 개미가 개미에게 라윤영 톱날에 베인 나무처럼 공장에서 해고당했다 호주머니에 남은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 몇 개 공원 빈 의자에서 깡소주를 들이켠다 이유 묻지 않는 낡은 의자가 자리를 내주었다 땅바닥에 개미가 지나간다 나도 가난한 일개미였다 앞만 보고 가는 개미 앞을 딱 막아섰다 멈칫 올려다 본 개미와 눈 마주친다 개미를 보는 개미는 안다 검은 몸뚱이 험한 세상 앞만 바라본 행로를 밟혀도 죽고 강물을 만나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 향기 좋은 꽃밭을 지나기도 했다 푸른 이파리는 허공의 좋은 침대다 나무에 올라가 운수 좋은 날 하늘광장의 흰 구름 휘휘 저어 구름지도를 새겼다 골목길 따라 발자국 도장을 찍고 개미가 개미에게 가고 있다 (게시기간 : 2023.06.25. ~ 07.01.) 1364 월급쟁이 박성규 월급쟁이를 그만두었다 구조조정 때문이었다 억지로 대가리 들이밀고 살기보다 다 때려치우고 낙향해서 사는 것이 좋다고 하여 월급쟁이를 그만두었다 ―누런 봉투 속에서 짤랑거렸던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의 잔소리가 들려온다 ―밀린 요금 납부 통지서가 우체통에서 고함친다 ―무일푼으로 살다가는 제 명에도 못살 것 같다 국민연금 수령하는 날 다시 월급쟁이가 되겠지만 (게시기간 : 2023.06.18. ~ 06.24.) 1363 두고 온 우산 김형엽 우산을 두고 왔다는 걸 그 도시를 한참 떠나와서야 알았다 용지호수 근처 쌈밥집에서 그 도시 사람들과 늦은 허기를 달래고 때마침 비가 내리지 않아 그냥 와버린 것인데 까짓것 비 맞는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우산을 두고 왔다는 걸 안 순간부터 마음이 못내 서글퍼진다 유목민처럼 살며 어쩌다 한 번씩 찾는 낯익은 도시 그 낯익음이 이제는 슬픔이 되어버린 도시 한 모퉁이에 팽개쳐져 있을 내 우산이 그곳에 남고 싶은 내 마음이었나 싶어 감추지 못한 내 그리움의 꽁무니였나 싶어 일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인가 우산은 마을 밖을 떠돌다 지쳐버린 늙은 까마귀의 날갯죽지처럼 엎어져 있을 터 잘 접어 끈으로 묶어두기만 했다면 누군가 넙죽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내 속에 사는 여러 마음 중에 끝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만 거기 홀로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아 멀어지는 기차 소리는 점점 처연하게 들리고 영동 지나 다시 차창으로 쏟아지는 비는 무엇하나 움켜잡지 못하고 미끄러지기만 하는 까마귀의 발톱마냥 붉게 부르트기만 하고 (게시기간 : 2023.06.11. ~ 06.17.) 1362 결투 박찬세 나처럼 재수 없는 놈이 또 있을까 조퇴하고 당구 치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도 당구 치러 오셨다 죽었구나 싶은데 담임 선생님이 뚜벅뚜벅 걸어오셔서 말씀하신다 -몇 치냐? 차마 250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서 150이라고 거짓말했다 선생님은 한 게임 치자며 200을 놓으신다 그리고 한 말씀 더 하셨다 -내가 이기면 넌 당구장 다신 오면 안 돼 -제가 이기면요? 내가 물었더니 -그때는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음…… 게임이 끝나고 선생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도 스리쿠션을 한 번에 뺀 거는 잘못한 일이다 그건 분명한 실수였다 (게시기간 : 2023.06.04. ~ 06.10.) 1361 내 나이를 사랑한다 이민영 내 나이를 사랑한다? 그때마다 나이도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맑은 하늘로 웃어주는 숨가쁜 정열로 무한히 뻗어 오르는 약동, 젊어지려는 내 나이를 사랑한다 늙지는 않으리라 젊은 사랑을 더욱 젊게 사랑하리라 소녀가 된 코스모스처럼 너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색색으로 방글거리리라 세월 앞에서는 검은 머리 세어지리라는 고백 속에서 아직도 숨 쉬게 해주는 이 하늘이 언제나 푸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잎새 하나가 다정히 내 무릎에 머물며 이야기할 때 가을을 사랑하듯 나의 나이도 그렇게 빛나고 만지면 눈부신 햇살이 된다 봄인 듯 여름인 듯 살아온 내 사랑 앞에 인자한 미소를 뿜어내는 나이의 가슴처럼 언제나 황홀한 내 나이를 나는 사랑한다 (게시기간 : 2023.05.28. ~ 06.03.) 1360 그냥 풀처럼 김종희 요즈음 매일 오후 두 시가 되면 나는 홍은동에 있는 작은 산을 오른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몸이 원하는 일만 할 뿐이다 먹는 일 잠자는 일 노는 일도 있지만 몸을 햇볕에 내놓아 볕을 쪼여주고 눈에는 푸른 하늘 파란 나무를 보여준다 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생명이니 그 원을 들어주려고 나는 홀로 이 적막한 산을 오르고 내린다 그냥 풀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게시기간 : 2023.05.21. ~ 05.27.) 1359 작업화를 신으며 박원희 일하는 사람들은 발에서 꽃이 핀다. 작업화 안전화 고무장화 봄날 화창한 꽃들이 떨어져 바닥에 꽃무덤을 만들 듯 일하는 사람들 발에는 꽃이 피고 가는 길마다 꽃자국을 찍는다. 밥꽃이 되고 삶꽃이 되고 희망꽃이 되고 사랑꽃이 되는 꽃다발을 만든다. 일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꽃다발을 묶는다. (게시기간 : 2023.05.14. ~ 05.20.) 1358 풀 한 포기 만나는 일 유상옥 비 내린 오후 수북이 자란 풀밭을 지나다가 싱그런 향기에 발을 멈춘다 멀리서만 보던 풀을 고개 숙여 본다 밟기만 하던 풀, 드러누우면 침대가 되고 뛰어놀면 운동장이 되지만 개미에게 집을 주고 지렁이에게 먹이를 주는 풀, 바람 불면 넘어지고 비 오면 고개 숙여 더 낮아지는 풀, 다 자란 자식 잃고 밤새도록 기도로 몸을 낮추던 단 칸 방 김 노인 텅 빈 가슴에 아침 햇살 쏟아지면 파릿파릿 얼굴을 편다 깎고 깎아도 다시 솟는 풀처럼 상처 먹고 사는지 멀리서도 여윈 팔을 흔든다 오월의 하늘은 저리 높은데 풀 한 포기 만나는 일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 (게시기간 : 2023.05.07. ~ 05.13.) 1357 깡통 심강우 나보고 깡통이래 축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고 머리가 텅 비었다고 형은 나만 보면 깡통 깡통 하는 거야 학교에서 오다가 깡통을 봤어 길 한복판에 떡 버티고 있는 거야 냅다 걷어찼지 일주일 동안 발에 깁스를 하고 다녔어 깡통은 무조건 비어 있다고 생각한 내 잘못이지 뭐 나를 뭘로 채워야 형이 조심할까? (게시기간 : 2023.04.30. ~ 05.06.) 1356 주름 송민화 엄마, 주름은 왜 생겨? 음 ...... 주름은 훈장이야 기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외로운 일까지 다 견디고 온 사람에게만 주는 거야 그럼 할머니는 훈장을 많이 받으신 거야? 그럼 그럼 스무살에 시집와서 60년 농사지은 할머니 주름은 금메달보다 값지고 진주보다 아름답고 영화보다 더 슬프지 근데 엄마는 그 얘기 하면서 왜 눈이 빨개져? (게시기간 : 2023.04.23. ~ 04.29.) 1355 괜찮아 이태학 가지에 머문 새 날아간다고 나무는 울지 않는다 '괜찮아' 다른 새 날아와 다시 앉겠지 밤새도록 때리는 거센 파도 등대는 울지 않는다 '괜찮아' 바람 자면 성난 파도 물러가겠지 비바람 지쳐 떨어진 꽃잎 목련은 울지 않는다 '괜찮아' 새 봄엔 새 꽃잎 다시 피겠지 딸아, 아들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살아라 그러는 사이 네 속에 괜찮은 사람 하나 의젓이 들어와 앉을 것이다 (게시기간 : 2023.04.16. ~ 04.22.) 1354 30cm 박지웅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거리 눈빛이 흔들리면 반드시 들키는 거리 기어이 마음이 동하는 거리 눈시울을 만나는 최초의 거리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최후의 거리 눈망울마저 사라지고 눈빛만 남는 거리 눈에서 가장 빛나는 별까지의 거리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거리 눈감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거리 숨결이 숨결을 겨우 버티는 거리 키스에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30cm 안에 들어온다면 그곳을 고스란히 내어준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23.04.09. ~ 04.15.) 1353 꽃나무를 심다 이양희 집 안에 꽃나무를 심는 일은 담 밖에 꽃을 피우는 일이다 묘목이 자라 첫 꽃을 피운 날처럼 어느 먼 봄날의 햇살에 저의 심장을 터뜨리며 마침내 담 밖으로 꽃을 내밀 때 오고가는 걸음을 꼭 붙잡는 일 그들의 마음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 담을 넘어 꽃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눈보라 치는 겨울을 견디며 그들의 꽃을 기다리게 하는 일 그들의 사계절을 일구게 하는 일이다 집 안에 꽃나무를 심는 일은 담 밖에 꽃을 피우는 일이다 마음 한쪽에 꽃나무의 묘목을 기르는 일이다 (게시기간 : 2023.04.02. ~ 04.08.) 1352 짐짓 모른 체 표성배 한 발짝이나 비켜서서 걷는 그림자를 부러 못 본 체 그냥저냥 걸어 볼 일이다 개나리꽃 노랗게 물들면 따라 그림자도 노오랗고 찔레꽃 하얗게 물들면 따라 그림자도 하이얀 노을이 내 이마 어디쯤 머물다 가면 따라 내 이마가 붉게 물드는 그런 길 한 번쯤 그냥저냥 걸을 일이다 가다 지치기라도 하면 잠시 노을의 옷섶을 끌어다 짐짓 모른 채 깔고 앉아 볼 일이다 어느새 따라 엉덩이 걸치는 그림자 엉덩이를 토닥토닥거리다 보면 내 이마 어디쯤에도 반짝 별 하나 슬쩍 자리 잡는데 그때서야 왔던 길 길게 되돌아볼 일이다 (게시기간 : 2023.03.26. ~ 04.01.) 1351 게발선인장 조용수 아파트 베란다 구석 화분에서 선인장이 겨울을 났다 물 한번 주지 않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어둑한 저녁 무렵 청소를 하는데 평소 나지 않던 냄새가 난다 어깨가 축 처져 있으면서도 줄기 끝에 꽃이 폈다 꽃을 피우려고 줄기의 허리는 잘록해졌고 뿌리는 얼마 남지 않은 흙을 꽉 쥐고 있다 나를 보더니 고개를 들어 웃는다 물 한 바가지 듬뿍 주었다 (게시기간 : 2023.03.19. ~ 03.25.) 1350 중년 나이 - 언제 한 번 노영임 언제 한 번 만나자 언제 한 번 밥 먹자 늘 언제 한 번으로 수인사 나누지만 누구도 묻지 않는다 그때가 언제인지 누구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청첩장에서 꽃샘추위 들이닥치듯 찾아든 부고장까지 툭하면 납기일 찍힌 고지서로 날아드는 걸 <부의>, <축의> 봉투 들고 품앗이 나선 날 얼마만이야! 호들갑 떨다 살며시 고명 얹듯 난 지금 바빠서 말야 언제 한 번 또 보자 (게시기간 : 2023.03.12. ~ 03.18.) 1349 행복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지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3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스무 살 뒷모습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지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게시기간 : 2023.03.05. ~ 03.11.) 1348 문득 양승준 모름지기 인생이란 이렇게 끌려갈 게 아니라 저 혼자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를테면 층층나무 그늘 속에서 곤줄박이의 울음소리를 귀 기울여 듣거나 맛있게 칼국수를 먹는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처럼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라 내 삶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그것이 비록 격정뿐인 삼류 멜로영화를 보는 것만큼 유치하거나 감동 없는 후일담의 주인공과 조우하는 것만큼 시시할지라도 나름 괜찮을 듯하다는 생각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막막한 생의 끄트머리와 마주했을 때 세월을 함께 건너오며 지켜본 그간의 삶에 유음(遺音)을 대신할 단상 하나 간략히 적은 후 내 이름자 아래에다 크게 수결(手決)*을 놓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순에 이르러 처음 맞이한 봄볕을 데리고 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게시기간 : 2023.02.26. ~ 03.04.) 1347 사랑해서 아프다 최수월 너를 모르고 살았더라면 사랑도, 그리움도 몰랐을 텐데 사랑한 만큼 아픈 것인지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아 가슴 한쪽 늘 아리고 아프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가슴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애틋한 그리움 백년이 흐른다고 지워질까 천년이 흐른다고 잊혀질까 다음 세상에 다시 만나도 여전히 사랑일 수밖에 없는 너 어느 날, 우연히 한번쯤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이토록 아프지 않을 텐데 (게시기간 : 2023.02.19. ~ 02.25.) 1346 이런 하루였으면 합니다 작가미상 사람의 향내가 물씬 풍기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렌지 같이 시큼하면서 달콤한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낼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물 같은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즐거워 할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난 행운아야라고 말하며 어깨에 힘을 더 할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거나 짜증나지 않고 미소 머금을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게시기간 : 2023.02.12. ~ 02.18.) 1345 사람 그리기 류정환 여기다 사람 좀 그려보라고 딸아이가 떼를 쓰며 도화지를 들이 미는데 백지가 사막같이 넓고 아득하다. 사람이 어디쯤에 있어야 하지? 사람을 어떻게 그리더라? 시험지를 받아 든 듯 정신이 아뜩하다. 울퉁불퉁 둥그렇게 머리통을 그리고 듬성듬성 머리카락, 퀭하니 마음을 알 수 없는 눈, 실없는 농담처럼 삐뚤어진 코, 허기진 듯 반쯤 벌린 입, 볼품도 없고 크기도 다른 귀를 붙여놓고 들여다보니 있을 건 다 있는데 왠지 허전한 게 아무래도 사람 같지 않아서 색연필을 못 놓고 머뭇거리고 있다가 이게 뭐냐고, 여태 사람도 못 그린다고 유치원 졸업반 딸아이한테 제대로 면박을 당하고 무안하여라, 하루 일의 절반이 사람을 보는 일인데 어려운 일 중에도 사람을 그리는 일이 어렵구나 설명하는 일 또한 어려워 쥐구멍을 찾다가 어렸을 적 수없이 그렸던 사람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민망한 눈길 아득한 사막을 헤매노라니 도화지 속의 얼굴이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이 절룩절룩 걸어 나와 내 어깨를 짚어줄 것만 같다. (게시기간 : 2023.02.05. ~ 02.11.) 1344 선택의 대가 박병찬 선택이란 무언가를 고르는 일종의 "행위" 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고른 게 없어도 선택이 됩니다. 즉 남은 것을 취하는 것도 선택이듯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것도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 후 우리는 각자의 결과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의 현재가 과거 선택의 결과물이듯 우리의 내일도 현재 선택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어떻게 되겠지를 바라는 선택, 부디 그 선택을 하지 마시길...... 이제 선택할 시간입니다. (게시기간 : 2023.01.29. ~ 02.04.) 1343 뜨거운 건 왜 눈물이 날까 김회권 손꼽아 기다렸던 설 아침이었지요 어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쇠뭇국을 놋그릇에 그득 담아 우리 어린 오남매를 아랫목 동그랗게 불러 앉혔지요 눈 환하게 와 닿는 그 맛이라니, 음식이 입으로 가는지 코로 가는지 오물거리는 어린 입과 둥글게 말아 쥔 꼬막손을 어머니는 마냥 흐믓이 바라보며, 오메 저것 보소, 입속에 밥 들어가는 저것 좀 보소! 당신도 입 안 가득 뽀얗고 뜨건 행복을 꼬옥 물고 계셨지요 이제와 생각하면 사람 사는 게 다 먹고 살자는 일이지만 마른 논바닥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거야말로 세상천지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이라던 어머니 뉘 볼세라 돌아앉아 쿡쿡 옷소매로 눈물 찍어내셨지요 오늘 그 반가운 날이 와 그 맛있다는 쇠뭇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순 쌀밥을 조반상에 올려놓고 나는 한입 가득 뜨다 말고 또 한입 뜨다 말고 알다가도 모르게 자꾸 자꾸만 입술 깨무는지 젖은 눈꺼풀만 공허니 끔벅거리는지 뜨거운 건 왜 눈물이 날까 (게시기간 : 2023.01.22. ~ 01.28.) 1342 김치찌개를 함께 먹는 다는 것은 한영희 냄비 안에서 서로를 껴안는 소리들 잘 익어 간다는 것은 적당한 온도와 양념이 버무려 져야한다 숙성된 김치를 듬뿍 잘라 넣고 소박하게 끓여먹는 김치찌개 백반 식구들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냄비 속으로 내려앉는다 침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순간이다 따뜻한 국물이 살 속으로 스며든다 맛있는 냄새를 기억하고 그 힘을 아침을 맞이하는 식구들 (게시기간 : 2023.01.15. ~ 01.21.) 1341 비닐하우스 강성은 추워서 들어간 그곳이 말할 수 없이 포근해 놀랐습니다 검고 촉촉한 밭고랑 사이로 푸른 상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밖은 겨울 이토록 얇은 비닐일 뿐인데 겨드랑이에 땀이 났습니다 안이 너무 넓고 투명해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닐 너머에 환하고 환한 빛들이 있는 것처럼 상추는 믿을 수 없이 크고 싱싱한 날개를 펄럭이며 이곳은 누구의 집인지 누구의 꿈속인지 묻지 않았고 끝없는 겨울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게시기간 : 2023.01.08. ~ 01.14.) 1340 새해 아침에 위영남 삼백예순다섯 개의 해를 숨겨 놓고 그 속에 우리들의 꿈도 묻어 놓고 '새해엔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 보셔요.' 조용히 속삭여 주는 삼백예순다섯 개의 까만 꽃씨들 새해 달력 앞에 서면 파도처럼 일렁이는 가슴은 희망이 꿈틀거리는 아침 바다 우리들 마음 속 꽃밭에도 삼백예순다섯 개의 꽃씨를 심고 둥근 해가 떠오를 때마다 곱게 곱게 피어날 우리들의 새해 꿈 (게시기간 : 2023.01.01. ~ 01.07.) 1339 꿈 노트 석기영 내 어릴 적 몽당연필로 침 발라 써놓은 낡은 모조지 공책에 쓰러질 듯 위태롭게 박혀있는 나를 보았지 그때의 꿈은 지금의 나보다 한 아름은 더 웅장해 보였지 그때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시시해진걸 보면 그동안 치열하게 전진한 까닭이다. 이 세상에 펼쳐진 위대한 일과 다가올 우리의 희망도 돌이켜보면 내 어릴적 꿈에서 비롯되었음을. (게시기간 : 2022.12.25. ~ 12.31.)


3-27.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23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