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21 년
 

   2021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익스플로러 단축키(Ctrl+F)로 시 제목, 내용, 시인 이름을 검색(?) 할 수 있습니다.  ^^;

1287 새해의 기도 김덕성 저마다 소망이 이루어 밤하늘의 별처럼 새해의 우리 삶이 새날의 태양같이 빛나게 하소서 마음을 비운 겸손함으로 끝까지 정의를 지키며 부끄럼이 없는 삶으로 꽃향기 같이 향기롭게 하소서 나밖에 모르는 세상이 아닌 서로 베푸는 삶으로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같이 깨끗한 영혼으로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무엇보다 앞서 용서와 배려로 사랑의 마음이 흘러가는 화해(和解)의 강이 되게 하소서 (게시기간 : 2021.12.26. ~ 2022.01.01.) 1286 반대 쪽 주영헌 당신이 나의 오른쪽에 있을 때 나는 당신의 왼쪽에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볼 때 당신은 왼쪽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우리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편이었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손은 차갑고 나의 손은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차갑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른 온도로 살아가는 것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서로를 위해 존재합시다. 나는 당신을 당신을 나를 위해 우리는 서로의 발이 되어 먼 길 걸어가는 외발입니다. (게시기간 : 2021.12.19. ~ 12.25.) 1285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권천학 가령, 손가락으로 개미를 누르는 일은 아주 사소하다. 그러나 손가락의 힘에 눌려 죽은 개미에겐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 저의가 없는 사소한 행동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절대로 힘을 생각없이 쓰지 않는 일만큼이나 사소하지 않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는 일은 사소하다. 남의 염통이 곪는 것보다 가시에 찔린 내 손가락은 사소하지 않다. 그보다 더 사소하지 않은 것은 가시에서 꽃을 피워낸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러나 가시밭길을 살면서 성공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더욱 사소하지가 않다 감기에 걸리는 것쯤은 사소하다.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까지도 사소할 지경이다. 그러나 폐렴으로 목숨을 차압당하게 될 때 감기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게시기간 : 2021.12.12. ~ 12.18.) 1284 추억에서 박정숙 국민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머리 곱게 땋은 여선생님이 처음 부임해 오시던 날.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얼굴울 붉히고 수업도 제대로 못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에 와서야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울 줄이야. 가끔 하얀 도화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하얀 겨울을 그리라고 하시던 선생님, 나는 하얀 겨울 대신에 선생님이 자주자주 얼굴 붉히시던 그 순진한 모습을 도화지에 몰래몰래 담아 그렸다. 하얀 얼굴의 눈사람이 아닌 얼굴이 붉은 눈사람을 그려놓고 아이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야단법석이었지만,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아시는지 싱긋이 웃으면서 "수"라고 적어 주셨다. 지금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선생님, 아니 마음씨가 고와서 자주자주 얼굴을 붉히시던 선생님이 12월 겨울의 문턱에서 누구의 그리움을 우는지, 하얀 눈이 아닌 부끄러운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린다. (게시기간 : 2021.12.05. ~ 12.11.) 1283 김재홍 숨 쉬며 걸어가는 순간순간을 헤집어보면 무수한 틈이 자리해 있다 햇살이 잘박하게 젖어가는 한낮 뒤로의 반짝거림 그러나 그 틈을 향한 돌문은 좀체 열리지 않는다 보도블록 사이로 떨고 있는 민들레의 꽃잎이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있는 마음 없다면 시장 후미진 좌판에 펼쳐진 할머니의 하얗게 주름진 눈짓 읽어 낼 수 없다면 창공에 넌지시 던져진 속살 구름 마음속 화폭으로 슬쩍 옮길 수 없다면 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찰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열사(熱沙)의 가시 돋친 선인장 같은 목숨만이 서걱이는 모래바람의 혀로 길게 드리워질 뿐 내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열어 느릿느릿, 더 천천히 몇 방울의 짠한 눈물로 세상으로의 연주를 시작할 때, 비로소 그 틈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틈 속엔 생을 밝힐 비밀이 무수히 숨어있다 (게시기간 : 2021.11.28. ~ 12.04.) 1282 장갑 홍정순 사람이 보인다, 장갑을 보면 그 사람의 손도 보인다 다섯 개의 구멍은 저마다의 굵기와 깊이를 가졌다 현장의 시작과 끝은 그들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장갑을 뒷주머니에 꽂으면 그게 작업장의 패션이 된다 찾는 장갑을 보면 기초를 하는지 미장을 하는지 도배를 하는지 진짜 이름은 예식 장갑이다 반코팅 장갑은 일용의 기본 장갑 인부들이 갖출 기초 장비 낱개로 사면 일이 없는 사람이요 한 타 사면 큰일 하는 사람이다 KT 직원이 목장갑을 사는 이유는 전봇대 때문, 목수 장씨가 용접 장갑을 사는 이유는 패널 때문, 무수촌 이장 이씨가 반도체 장갑을 사는 이유는 접과 때문, 장갑엔 저마다의 이유가 들어 있다 장갑엔 저마다의 일이 들어 있다 저마다의 목소리는 사는 이유가 된다 (게시기간 : 2021.11.21. ~ 11.27.) 1281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강경화 서리내린 저 밭의 배추잎 끝에서 이제 나는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추위가 몰려 오면 흙벽에 제 눈만한 창문을 내고 울며 울리는 사람들. 날 부르는 뜨거운 눈물이 안 보일지라도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삽날이 밀려와 내 집 밑둥을 자르고 밤마다 흙더미 사이로 별이 보이면 내 사랑은 흐르는 한 줄기 강물 가을 빛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잘 있거라. 누런 들판아, 탱자나무야 속삭이는 낙엽소리와 연기 내음도 두고 캄캄한 땅 속에서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게시기간 : 2021.11.14. ~ 11.20.) 1280 은행나무 윤민희 독산성 둘레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에 노란 햇살이 왔다 강한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던 저 완숙된 빛깔들 노랗고 환하고 눈부시다 잔바람이 밑동에서 몸통에서 이파리에서 맴돌다 어깨를 툭, 치자 노란 환상들이 터진 봇짐에서 반짝거리며 나풀거리며 경쾌하게 쏟아져 바닥을 구르는 황금빛 물결 중년의 곡선처럼 우아하게 일렁인다 길 위에 펼쳐진 퇴화된 젊은 날들 가을해가 순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덧칠하고 있다 시래기 된장국을 끓였다는 친구 포장마차에 있다는 남편 낙엽 밟는 소리에 소담스런 꽃무늬로 수를 놓는다 (게시기간 : 2021.11.07. ~ 11.13.) 1679 서귀포 오일장에서 김지윤 매일 비워졌다 또 밀물 차오르는 모래톱처럼 닷새마다 꼬박꼬박 열리는 오일장 가을감자 파는 좌판 할머니 앞에서 한 푼, 두 푼 버릇처럼 감자 값을 깎다 “하영 주쿠다 (많이 줄게요)”, 하며 감자 자루 내미는 부르튼 손 검은 흙 낀 손톱 보며 할머니 텃밭 감자 위로 하영 쏟아졌을 뙤약볕처럼 사뭇 낯 뜨거워져 “바람이 차요, 남은 것 제가 다 사드리면 집에 가 쉬실래요?” “응, 응, 경허믄 고맙수다게(그러면 고맙지요)” 할머니 말씀에 그만 감자를 한 무더기나 사서 한 바퀴 돌다 집에 가는 길 아까 그 자리 그대로 한 무더기 감자를 또 그만큼 앞에 내놓고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할머니 할머니의 좌판에 놓인 감자를 정녕 내가 모두 가져갈 수 있다고 믿다니! 늘 그만큼의 부피와 무게가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게, 삶이라고 좌판에 앉은 할머니 나를 조용히 꾸짖는 듯하다 그날 저녁 소반 가득 찐 감자를 내놓고 자꾸 먹어도 허기지다 한 입씩 베어 문 듯 자꾸 비워지는 초승달처럼, 어둠이 살라먹은 자리 다시금 채워지는 만월(滿月)처럼 (게시기간 : 2021.10.31. ~ 11.06.) 1678 사라진 요리책 신수옥 배추 세 포기 절이려고 소금 항아리 열고 망설이다 전화기를 든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신호 한번 가지 않고 들리는 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낯선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힘이 빠진다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올라온다 큰언니의 번호를 눌러본다 소금 몇 공기 퍼야 하는지 모른다고 울먹이자 이 바보야, 네 나이가 몇인데 말끝을 흐린다 내 요리책이었던 엄마 음식 만들다 말고 전화기만 들면 몇십 년 한결같이 초판 내용을 유지했었다 몇 번을 물어도 반갑게 말해주던 엄마 음성 그리워 배추를 절이다 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는다 눈물로 푹 절여진 얼굴 간이 밴 표정이 엄마를 닮았다 (게시기간 : 2021.10.24. ~ 10.30.) 1677 낙엽에게 길을 묻다 염병기 가을 자취를 밟으며 향기로 다가오는 낙엽에게 가야 할 길을 물었습니다 여름 끝에서 시작된 길은 딴 세상 같은 변화에 사색의 계절은 그리움을 끌어냅니다 들녘에 펼쳐지는 풍경은 변함없이 찾아온 자연의 섭리였고 보내고 나면 아쉬움에 물들 가을을 길을 걸으며 가슴에 담으려 합니다 여름을 지나며 견딘 그리움이 계절의 잔치를 위한 시간이었나 봅니다 인적 드문 숲길이 아니더라도 이곳, 저곳에 남겨 놓은 고즈넉한 정취에 생각의 결이 여물어집니다 어느새 휘감아 도는 낭만의 색깔들 형형색색 스치고 지나는 자국마다 만추(晩秋)의 흔적은 바스락거리며 햇살에 펄럭인 향기는 길 위에도 있었습니다 아, 이 가을이 다시 돌아올 날을 그리워하며 낙엽이 내준 길 따라 계절의 끝자락에 닿을 때까지 걸어가렵니다 (게시기간 : 2021.10.17. ~ 10.23.) 1276 미지근에 대하여 박정남 국수를 주문하는데 전원이 다 미지근한 국수가 좋다고 해 미지근을 시켜놓고 보니 이 모임 참, 미지근해서 오래간다 싶다 생각하니 다다음달이 벌써 10주년이 되는 달이다 미지근이 미덕이 되었으니 이젠 이름 하나쯤 가져도 좋겠다는 제안에 누군가 미지근으로 하자고 하여 웃으며 결정을 보았다 이름 하나 얻는 데도 장장 10년이 흘렀으니 그 뿌리도 참, 미지근하게 깊다 미지근해서 술술 잘 넘어가는 국수에 국물까지 두 손으로 받쳐들고 단숨에 들이켜자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어느덧 남쪽 산에선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다 미지근하게 끓어오르는 정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곰곰 생각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저 바다는 단절이 아닌 미(美)와 지(知)에 뿌리(根)를 박았던 것 한결같은 그 마음 위로 미지근한 달빛이 요요하기만 하다 (게시기간 : 2021.10.10. ~ 10.16.) 1275 산다는 것은 길용숙 그것은 아무리 말려도 날아가지 않는 습기 말릴수록 젖어 가는 옷자락 그것은 어깨 가득 짊어진 등짐 벗을수록 무거워지는 짐 그것은 젖은 채로 짊어진 채로 껴안아야 하는 세계 (게시기간 : 2021.10.03. ~ 10.09.) 1274 시월이 오면 그대 오려나 김용관 시월이 오면 하늘에 곱게 물 들여진 낙엽 호수에 살짝 띄워 놓고 누군가 기다려지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시기간 : 2021.09.26. ~ 10.02.) 1273 이사의 기억 홍은택 이사할 때 가장 힘든 건 기억을 옮기는 일 식탁의 기억, 소파의 기억 책상의 기억, 침대의 기억 싱크의 기억, 변기의 기억까지도 기억은 멀미가 심해서 기억은 멀리 데려가지 못한다 희미하게 불 켜진 기억의 집 기억은 고집이 세다 (게시기간 : 2021.09.19. ~ 09.25.) 1272 찬지름 들지름 송진권 찬지름 들지름들이 서울 갑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변에 모랫벌에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여름내 김매고 땀 흘려 가꾼 참깨 들깨 들이 찬지름 들지름이 되어 소주병에 담겨 서울 가는 기차를 탑니다 마른 나무 강변말 해바라기 선 집 들지름 발라 김 구워 주면 미어지게 먹던 막내를 생각합니다 날달걀 깨서 찬지름 떨어뜨려 밥 비벼 주면 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해치우던 맏이를 생각합니다 (게시기간 : 2021.09.12. ~ 09.18.) 1271 귀뚜라미 생포작전 정원도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남은 여름마저 몰아내려고 열어둔 창문 사이로 귀뚜라미 한 마리 아장아장 거실 안으로 뛰어든다 그냥 두면 누구의 발에 압사 당할지 알 수 없으므로 밖으로 돌려보내자고 생포하기로 하는데 그는 남의 속도 모른 채 붙잡히지 않으려고 잽싸게, 애타게 달아난다 이런 것이 짝사랑일 것이다 그냥 콱 움켜잡기는 쉬운데 손아귀 속으로 귀하게 모시자니 어렵다 지금 그를 생포하는 것은 이 가을을 다 생포하는 것이므로 사력을 다해 따라다니다가 손 안에 모시는 행운을 잡았는데 혹시나 저를 해치는 손길일까 버둥대는 몸짓 고이 풀밭에 내려놓는다 이 가을을 고스란히 내려놓는다 (게시기간 : 2021.09.05. ~ 09.11.) 1270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문차숙 그때는 뾰족 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 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 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 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하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 (게시기간 : 2021.08.29. ~ 09.04.) 1269 혼자 울지 마라 정용주 하늘 아래 어떤 슬픔도 온전히 한 존재의 몫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 먼 단풍도 홀로 붉지 않는다 한 바람이 서늘한 능선의 가슴을 쓸면 마침내 모든 나무가 서로에게 물들어 가난한 영혼의 연대가 온 산에 붉다 들꽃을 바라볼 때 꽃의 귀는 너를 듣는다 홀로 슬퍼 자기를 연민할 때도 꽃은 피고 사랑은 간다 한 마음 괴롭히는 그 까닭으로 모든 영혼이 운다 우리는 모두 물들어 간다 혼자 울지 마라 (게시기간 : 2021.08.22. ~ 08.28.) 1268 납작한 풍경 김주애 며칠 내가 집에 없응께 집 터서리에 풀이 천지라 저것들은 잘 뽑히지도 안해여 뽑아도 뽑아도 뿌리에 흙이 타박하게 붙어서 잘 죽지도 안 한데이 채울 것 없던 헛간을 밀어내고 만든 텃밭 어머니 질긴 풀을 뽑으신다 저것들도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게다 못 쓴다고 눈에 들지도 못하는 것들 질기게 살아야 씨라도 뿌리는 걸 되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콘크리트 담이라도 숨구멍이 있는 곳이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을 봄날 따신 밥 위에 얹히지도 못한 독한 풀 납작하게 눌러 붙어 잘 잡히지도 않는 것을 한 줌씩 뜯다가 후벼 파다가 더러 뽑히기도 하다가 주절주절 할 말이 많아진다 끝끝내 고분고분하지 않은 몇은 땅을 움켜쥐고 멍울멍울 자란다 그래도 저것들도 희꾸무리한 꽃이 핀데이 (게시기간 : 2021.08.15. ~ 08.21.) 1267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한비야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 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게시기간 : 2021.08.08. ~ 08.14.) 1266 다음부터 박세현 다음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어딘가 근지러워 남모르게 몸을 꼰다 다음에 또, 그럼 다음에 그래서 다음에는 가보지 못한 길이 있고 달달한 사랑도 있고 전하지 못한 안녕도 있다 갚아야 할 말빚도 기다리고 있지 읽다 남겨 둔 에세이도 있고 밤새 들어보고 싶은 음악도 있을 것이다 한 잔 하자는 약속도 멀쩡히 살아 있다 정말은 정말 다 다음에 묻어두는 게 아닐까 다음은 모든 이의 어쩌지 못한 꿈이다 다음에는 없는 것이 없다 있다 다음에는 딱 한 가지 지금이라고 말하는 이 순간만은 없고 또 없다 다음이라고 말할 때 부디 조심하자 다음부터! (게시기간 : 2021.08.01. ~ 08.07.) 1265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이나명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돋아있는 민들레 잎사귀들이 작은 실톱 같다 이제 막 시멘트 블록을 힘들게 톱질하고 나온 듯하다 무엇이 저렇듯 비좁은 공간을 굳이 떠밀고 나오게 했을까 저 여리고 푸른 톱날들을 하나도 부러뜨리지 않고 시멘트 블록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다 이제 꽃대를 올리면 금빛 꿈의 꽃망울이 허공에 반짝 피어나겠지 시멘트 불록과 불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작은 민들레 한 포기 푸르게 펼쳐놓은 세상을 본다 저 푸른 세상 속 그 무엇이 이렇듯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짐짓 끌려가 또 한 세상 깜빡 빠져드는 것일까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실톱 같은 작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세상을 펼치고 있다 (게시기간 : 2021.07.25. ~ 07.31.) 1264 몸과 마음 사이 이광용 몸이 아프면 마음은 몸이 떼쓴다고 귀찮아 하는데 마음이 아프면 몸이 위로한다고 같이 아파한다 마음이 아픈데 몸까지 아프다고 원망도 하고 비난도 해보지만 어디 제 몸을 탓하랴 아무리 못생기고 보잘것없어도 마음을 제일 먼저 느끼고 알아주는 건 제 몸이거늘 그저 마음의 눈치 보며 마음 가는대로 따르겠다고 자신을 내맡기는 몸더러 마음을 따라오지 않는다고 어찌 천하다 구박하며 마구 부려먹었을까 마음이 아프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몸 저 몸이 내 몸이었지 (게시기간 : 2021.07.18. ~ 07.24.) 1263 고슴도치 김환식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 있다 나도 가끔은 고슴도치가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 고슴도치처럼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내 몸 속에는 수만 개의 가시바늘을 숨겨놓은 채 남의 가시 하나에 내가 다칠세라 엉거주춤 견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간격을 두고 산다는 것은 적당하게 불신하며 산다는 것이다 내 숨겨둔 가시에 찔린, 그의 상처를 품어줄 수 있을 때 불신은 치유의 길을 걷을 수 있다 가까우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소소한 말 한 마디에 당신의 가슴은 무너지는 것이다 고슴도치도 새끼를 품고 산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보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21.07.11. ~ 07.17.) 1262 친절한 인생 최정란 처음 바닥에 패대기쳐졌을 때 알았어야 했어 삶은 내게 친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 누가 백일홍의 발목을 거는지 걸핏하면 엎어지지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드려 알게 되지 허방은 지하주차장 경사로에 숨어 있고 허방은 꽃 속에서 나풀거리며 날아오르고 이번 생은 발에 안 맞는 빨간 뾰족구두 이번 생은 킬힐에 안 맞는 평발 그렇다고 내가 삶에게 불친절할 필요는 없잖아 백일홍에게는 백일홍의 하늘이 있으니까 (게시기간 : 2021.07.04. ~ 07.10.) 1261 모래시계 이석현 기다림도 순간이다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 서두르거나 다투지 말자 뒤집어 바꿔놓고 보면 앞서 가는 너보다 내가 더 빠른 법 산다는 것은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천천히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21.06.27. ~ 07.03.) 1260 씨간장 임후남 햇간장에 씨간장을 넣으면 엄마 맛이 난다 할머니 묵은내도 나고, 또 그 위에 기억 없는 할머니 손맛도 온다 엄마의 간장은 내게로 와서 짜지 않은, 다디단 맛으로 속삭인다 네 입맛대로 해 당신 입맛대로 살지 못한 엄마가 다시 속삭인다 네 입맛대로 해 햇간장에 엄마와 할머니들의 맛을 넣고 내 입맛을 찾아본다 지금은 햇살 사라지는 오후 (게시기간 : 2021.06.20. ~ 06.26.) 1259 막차 이덕규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 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게시기간 : 2021.06.13. ~ 06.19.) 1258 잃어버린 우산 권석창 비 오면 우산 들고 나가 비 그치면 잊어버리고 느닷없이 문득 잊었던 사람 생각나듯이 느닷없이 문득 잃어버린 우산 생각이 난다 지금쯤 어느 집 처마 밑에 개와 더불어 잠들어 있을까? 좋은 사람과 함께 비를 맞고 있을까? (게시기간 : 2021.06.06. ~ 06.12.) 1257 그대의 힘 이인구 아내가 없는 집은 참 넓다 늘 나란히 앉았던 소파에서 식탁 너머 창까지 무료해진 시선 가는 길 수 헤아릴 만큼 길다 언제나 환할 줄만 알았던 집 안도 어둡다 아내가 없으면 불을 켤 필요가 없다는 것 처음 알았다 그리고 또 아주 고요하다 아내가 없으면 전화도 울리지 않고 티브이도 떠들지 않는다 귀찮던 아이들 노는 소리 세탁 외치는 소리 타박하던 내 목소리까지 다 쓸어 담아 아내가 데려갔을까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아내가 없으니 나 갑자기 밖에서 온 자로 있어야 할 것들이 있을 자리를 하나도 채우지 못해 망연히 홀로 된 느낌 아내가 없으니 여태 산 것이 다 남의 집살이였던 듯하다 이렇듯 몰랐던 그대의 힘 (게시기간 : 2021.05.30. ~ 06.05.) 1256 장미 양상용 세상에 티 하나 없는 무구한 인생은 없어 부딪히고 금이 가다 보면 깨지지 않게 조심하게 되고 그렇게 상처받다 보면 어느새 어여쁜 장미에도 가시가 돋아나지 괜찮아! 네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네가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거란다 네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갈망하듯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란다 너에게 돋아난 가시를 너무 걱정하지는 마 가시가 돋아난 장미에도 나비는 찾아온단다 (게시기간 : 2021.05.23. ~ 05.29.) 1255 응, 응 권애숙 살아보는 거다 응달을 먹고 피는 꽃들을 봐라 은방울꽃, 꽃고비, 둥글레 얼마나 씩씩하냐 양지만을 지향하는 덩굴들이 시끌시끌 볕 좋은 곳으로 모여들어도 저를 다 푼 향기로 음지를 살려내는 것들 온몸으로 은종을 흔든다 사방팔방으로 꽃사다리 놓는다 둥글게 은근하게 바깥을 빛내는 족속들 응달에 산다고 꿈까지 응달이겠나 내면 그득 양달을 품고 그늘을 데우는 해맑은 당신의 전부가 빛이다 응, 응, 잘 했어 힘내자 달달하게 등 토닥거려주는 당신이나 나나 하층의 힘 센 음지식물들 (게시기간 : 2021.05.16. ~ 05.22.) 1254 젊은 날의 초상 이경우 휴일 아침 바람처럼 달려가는 용달차를 본다. 어느 풀잎 같은 가장이 다시 새 보금자리 찾아 이사를 하는가 덮어씌운 비닐을 깃발인 양 펄럭이면서. 한창 벌꿀처럼 달달해야 할 신혼부부가 낯선 근무지 전출 명을 받아 찾아가고 있는 건지. 제집의 불안을 느낀 논병아리들이 서둘러 다른 둥지 찾아 옮겨 가는 것처럼 혹여, 집 없는 서러움에 눈물지며 떠나는 건 아닌지. 차가 신호등에 잡혀있는 동안 앳된 가장 고개 내밀고 흘낏 돌아보는데 내가 왜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까.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텔레비전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유치원 어린이들처럼 얌전히 포개 앉은 고만고만한 살림도구들. 소꿉장난감 같은 저 이삿짐 풍경이 왜 이렇게 내 눈에 낯이 익는 것인지. 남들은 편히 쉬고 있는 휴일 아침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속절없이 실려 가는 저 까치집 같은 살림살이들. 그걸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왜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게시기간 : 2021.05.09. ~ 05.15.) 1253 난 어린이가 좋아 이정훈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이 많고 빈 병 같은 어른들은 싫어. 어린 나이에 모르는 걸 배우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라를 위한다면서 내 주장만 내세우고 내 욕심만 차리는 거짓말투성이 어른들은 싫어. 동무끼리 다정하게 공부하면서 배고픈 동무들을 걱정해 주고 밥 한끼 나눠 먹는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걸핏하면 웅성웅성 데모하는 어른들은 싫어. 오순도순 사귀면서 지혜로 자라는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두 동강 난 우리 나라 통일 못 이루고 형제끼리 맞서는 어른들은 싫어. 금강산 마을 제주도 섬마을 서로서로 손잡고 노래부르는 어린이가 난 좋아. (게시기간 : 2021.05.02. ~ 05.08.) 1252 짧은 영화 구경 문익호 젊음이 가득할 때는 오늘 내일을 오르내리며 살았는데, 한 세상 살고 나니 이제는 점점 어제 오늘을 오락가락하며 산다. 햇볕 좋은 산기슭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풀꽃 같은 추억들이 이 세상 곳곳에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풀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 향기로운 눈길을 보내듯, 추억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 그리운 동영상을 보여준다. 잠깐 사이에 짧은 영화 구경을 또 했나 보다. (게시기간 : 2021.04.25. ~ 05.01.) 1251 밑창을 갈다 이성웅 신발굽이 나를 인도한 곳은 구두병원이었다 앞만 보고 걸은 것뿐인데 바깥쪽이 달아있었다 내 중심을 잡아준 것은 약삭빠른 머리도 부지런한 발도 아닌 구두밑창이었다 몸통이 깎여나가는 동안 길을 편히 다닐 수 있었나보다 말없이 내 하중 받아내며 동행했던 것이다 걸어온 길의 이력이 새겨진 뒷굽 주위의 보폭을 가늠하지 않았던 성급한 내 걸음을 제어한 흔적이 역력하다 바른길만 걷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발만큼이나 허술한 수선공, 내 얼굴 힐끗 보곤 밑창을 갈아치운다 시속 0키로의 휴식, 아득한 발자취를 섬긴 기억과 들락거린 비밀까지 모두 지워버렸다 정작 갈아야 할 것은 무겁거나 치우친 내 안쪽인지도 모를 일, 새삼 걸음이 낯설다 (게시기간 : 2021.04.18. ~ 04.24.) 1250 놀이터에서 배운 것들 이장근 닿을락 말락 하는 철봉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손가락 끝에 살짝 닿았을 때의 짜릿함이 더 높은 곳을 보게 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그넷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높은 것보다 좋은 건 더 높은 거였지만 떨어지기 전에 잠깐 멈추는 순간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줄을 놓고 뛰어내릴 때가 제일 좋았지만 누군가 올라가면 누군가 내려와야 했다 한 쪽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우면 재미가 없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앞으로 다가가 앉거나 뒤로 물러나 앉아야 했다 계단으로 올라가서 미끄럼틀로 내려오는게 싱거워지면 미끄럼틀로 올라갔다 그러다 내려오는 친구에게 떠밀려 미끄러지기도 했는데 종종 싸움이 벌어졌다 올라가는 사다리가 옆으로 놓이니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다 건너가는 게 올라가는 것보다 어려웠다 (게시기간 : 2021.04.11. ~ 04.17.) 1249 주유소 풍경, 차와 사람들 최병무 아우디를 몰고 오는 운전자 중에 정중히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반도체 하청공장을 하고 있다는 그 사람은 나보다 더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꼭 돼지상을 한 그 아줌마는 체어맨을 몰고와 코를 푼 휴지를 내 발 밑에 던지고 간다 젊은 사장 박공원씨는 포크레인을 트럭에 업고 와서 경적을 울려댄다 자기가 나를 먼저 봤다는 싸인이다 아침마다 애마같은 장비에게 큰 절을 하고 나온다는 그 사람은 인생이 즐겁다 그는 좌우명이 '웃으며 살자'라고 했다 우리는 급히 친해진 사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더 자주 장비에게 말을 걸고 쓰다듬어 주라고 했다 그를 위해 기름 값이 더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시기간 : 2021.04.04. ~ 04.10.) 1248 설거지 성숙옥 싱크대에 쌓인 그릇 밥알의 하루를 지운다 겹쳐 빠지지 않는 그릇을 찬물과 더운물에 담그니 싱겁게 몸을 드러낸다 이렇게 단순하게 풀릴 것을 힘으로만 해결하려 했다 소박한 온기가 그릇의 집착을 놓게 한다 접히는 바람과 풀리는 하늘에도 답이 있음을 문이라고 믿고 두드린 벽의 일들 어쩌면 살아가는 일이란 한 곳의 축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아도 제자리만 맴도는 헛방인지도 모른다 동그라미가 커지는 순간과 터지는 순간 사이 넓이를 따르다 엎질러지고 마는 물인지도 쏴아 쏴아 식경(食經)을 씻는다 허공을 익힌 허기와 길에서 다시 찾은 길까지 다 지워진다 뽀드득,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닦인 그릇의 탄성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 살며시 그 위에 포개본다 (게시기간 : 2021.03.28. ~ 04.03.) 1247 목련꽃 김귀녀 지난해 가지치기한 목련을 보았네 목련 봉긋한 가슴들이 망울망울 맺히고 있었네 홀로 힘겹게 홀로 피었네 텅 빈 가지에서 아픔이 하얗게 피는 줄 모르고 있었네 고개를 떨구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줄만 알고 있었네 봄이 이렇게 아프게 오고 있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내 모습 부끄러워 땅만 보았네 (게시기간 : 2021.03.21. ~ 03.27.) 1246 진달래꽃 손상근 감추려 애써도 자꾸자꾸 망울지는 이 붉은 그리움 아직은 쌀쌀한 당신인데도 그 앞에 자꾸만 부푸는 가슴 오늘은 당신 앞에서 붉고 붉은 빛으로 피는 사랑을 감출 수가 없네요 (게시기간 : 2021.03.14. ~ 03.20.) 1245 산 위에서 김원기 산 위에서 보면 바다는 들판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새싹처럼 솟아오르고 싶은 고기들의 설렘을. 산 위에서 보면 들판은 바다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고기비늘처럼 번득이고 싶은 새싹들의 설렘을. 산 위에 서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순한 짐승 그러나 너는 알 거야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싶은 내 마음의 설렘을. (게시기간 : 2021.03.07. ~ 03.13.) 1244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김신영 살아온 마디만큼 응시가 깊어지고 당신을 그리워할 때가 되면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새로워진 것들이 하나둘 붉은 얼굴을 불러들이는 봄 얼굴 가득 들어찬 주름을 털어 내 나도 봄을 불러 들인다 너무 아픈 기억이 만든 사랑도 봄이 되는 저녁 잊을 수 있을까 두렵던 날도 봄빛을 담는다 두근거리는 저녁 사랑 하나 품어 몰래 간직한 바람, 숲, 안개가 봄빛이다 어딜 가나 당신이 있다 봄빛나무 잔가지에서 눈을 반짝이고 무성한 이파리들 속에도 당신이 있다 하얀 눈이 내려 덮인 산하에도 첫사랑같은 문장이 스며 나무에 묶어둔 마음이 봄이 된다 인생이 어느 가시밭길을 갈지 모르나 연탄길같은 다정을 키워보는 것 바람부는 마음을 안고 걸어도 봄을 안고 걷는 것 오늘 종로방향은 봄빛 일색이다 하늘이 흐리고 마음은 더 광막하여도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꽉 막혀 있어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때가 되면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게시기간 : 2021.02.28. ~ 03.06.) 1243 오래된 구두 박천서 오늘을 끌고 가는 상념을 따라 오래된 구두 뒤축에서 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삶의 질곡에 밤과 낮 자갈길도 휘어진 비탈길도 묵묵히 따라오는 줄 알았더니 언제부터인가 살갗이 갈라지며 답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지만 칭얼거려도 무시당하는 것이 없는 놈이 팔자라며 타이르고 비오는 날 발끝을 세워도 질퍽한 양말 울음 앞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앙다물고 손가락 헤아리며 날짜를 잡았지만 쉬 지켜지지 않는 신음소리 지친영혼 선술집 찾아들어 행여 누가 볼세라 구석진 자리 감추어보는 내 안에 근심 닳아빠진 구두 뒷굽 속에 들어앉은 사내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게시기간 : 2021.02.21. ~ 02.27.) 1242 스민다는 것 참 좋은 것 같다 이승용 어둠은 빛에 스미고 어제는 다시 오늘에 스미고 당신은 내게 스미듯 나 당신께 스민다 시간을 계절에 스며들어 겨울을 여는 것이다 또한 침묵에 스며들어 봄이 자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금이 있다 사랑도 스미는 것이다 틈으로 스미는 일로서 새로운 무엇이 여는 것이다 스미지 않고서는 닫힌 마음을 열 수 없고 언 땅을 열 수 없는 것처럼 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스며든 풀잎에는 생기가 있다 스며든 사람 사이에는 이해가 있다 스며들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안다 이파리의 떨림이 나비의 흔들림이 모두가 스미는 일로서 꽃이 핀다 스며든 새벽이 있어 눈을 뜨고 맑고 깨끗한 아침을 맞는 중이다 스민다는 것은 착한 영혼이다 부드럽고 고운 혼이다 스민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다 (게시기간 : 2021.02.14. ~ 02.20.) 1241 꿈이 사라진다는 것은 신동집 꿈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서서히. 그러나 꿈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사실이다. 얼룩진 아침노을의 식은 열이 되어 때로는 그러한 흙비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꿈이 사라진다는 것은 또 한번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서서히. 그러나 꿈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다시 한번 사실이다. 덜렁이는 남루의 자락이 되어 절룩이는 흙발의 막대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정중히 일어서 마중을 할 일 맞아서 말 못할 회포나 풀 일 한때는 보듬던 꿈이었으니 그런 날의 향기였으니. (게시기간 : 2021.02.07. ~ 02.13.) 1240 어머니가 고향이다 허동인 '고향' 하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 하면 고향이 생각난다. 딸자식은 다 출가시키고 아들자식은 다 객지에 나가 살고 붙박이 별처럼 홀로 고향을 지키시는 우리 어머니 어릴 때 살았던 고향집이 생각날 때면, 선영들이 잠들어 있는 고향 산천이 그리울 때면, 어머니가 곧 고향이다. 고향이 곧 어머니다. (게시기간 : 2021.01.31. ~ 02.06.) 1239 이선유 주머니를 따듯하게 하는 말 대형마트에 포인트가 있다면 재래시장에는 덤이란 게 있지요 동태 두 마리 사면 홍합 한 줌 집어주고 배추 세 포기 사면 생강 한 톨 얹어주는, 무언가 쥐어주고 얹어줘야 마음 편한 넉넉한 손들 덤의 공식은 마음에 마음을 더한 것 덤의 온도는 체온에 체온을 더한 것 마음이 추운 날은 시장으로 가지요 주고받는 훈훈한 거래에 사람 냄새가 나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끈이 있듯 덤과 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끈이 있지요 끈끈해서 끊을 수 없는 끈 끈적끈적해서 발을 뺄 수 없는 끈 시장에는 전자저울보다 손저울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게시기간 : 2021.01.24. ~ 01.30.) 1238 하루의 사용법 조재형 슬픔은 수령하되 눈물은 남용 말 것 주머니가 가벼우면 미소를 얹어 줄 것 지갑을 쫓지도 지갑에 쫓기지도 말고 안전거리를 확보할 것 침묵의 틈에 매운 대화를 첨가할 것 어제와 비교되며 부서진 나 이웃 동료와 더 견주는 건 금물 인맥은 사람에 국한시키지 말 것 숲 속의 풀꽃 전깃줄의 날개들 지구 밖 유성까지 인연을 넓혀 갈 것 해찰을 하는데 1할은 할애할 것 고난은 추억의 사원 시간을 가공 중이라고 자위할 것 돌아오는 길에 낯익은 별들에게 윙크하기 잊지 말 것 (게시기간 : 2021.01.17. ~ 01.23.) 1237 100%는 없다 이진이 햇빛은 비타민D를 생성해서 구루병. 충치. 골절을 예방해주고 면역력을 증강시켜주지만 기미와 주름을 생기게 한다. 커피는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노화를 방지하지만 위염과 불안증세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랑은 둘이 함께하기에 외롭지 않게 하지만 둘이기에 더 외롭게 하고 일상의 행복은 시련이 있어야만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사람도 인간관계도 행운도 악운도 세상 어느 것 하나도 100% 나쁘기만 하거나 100% 좋기만 한 것은 없다 (게시기간 : 2021.01.10. ~ 01.16.) 1236 발의 본분 조경희 발은 걸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발바닥이 지면과 맞닿아 땅을 딛고 서 있을 때 발은 발다웠다 걸어야 한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깁스에 결박당해 있던 지난 며칠 동안 발은 발이라기보다 한낱 석고에 지나지 않았다 걷는 일이야말로 발의 본분이며 진보이고 또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깁스를 풀고 오른쪽 발을 바닥에 내딛는 순간 묵직한 지면이 발바닥을 자극하며 발에 힘이 실렸다 중력을 받들어 꾸욱, 바닥에 바닥을 포갰을 때 지구를 들어 올리는 힘의 중심이 되었다 발은, 멈췄던 길을 다시 부른다 눈앞에 지도가 펼쳐지듯 걸어서 가야 할 길들이 어서 오라 그의 발을 끌어당긴다 왼발, 오른발, 왼발은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아무리 가보고 싶어도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는 것도 발바닥에 지문처럼 새겨두었다 새들이 먼 하늘을 날 때 희열을 느끼듯 발은 먼 길을 여행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때 걸음이 가벼웠다 (게시기간 : 2021.01.03. ~ 01.09.) 1235 새해엔 최계락 무거운 얼음장 밑을 그래도 냇물은 맑게 흐른다. 그렇다 찬바람을 가슴으로 받고 서서 오히려 소나무는 정정한 것을. 새해엔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어둡고 답답한 땅 속 깊은 곳에서도 지금쯤 새 봄의 기쁨을 위해 제 손으로 목숨을 가꾸고 있을 꽃씨. 그렇다 언젠가 이른 아침을 뜨락에 쏟아지던 그 눈부신 햇살처럼 나도 새해엔 그렇게 살아야지. (게시기간 : 2020.12.27. ~ 2021.01.02.)


3-25.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21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