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20 년
 

   2020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익스플로러 단축키(Ctrl+F)로 시 제목, 내용, 시인 이름을 검색(?) 할 수 있습니다.  ^^;

1218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박완호 사랑한다고 썼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의 부재를 긍정하는 일, 물 위를 나는 잠자리의 날갯짓에 얹힌 눈길에 잠깐 머뭇거리는 수면의 굴곡을 감지하는 일, 누구도 읽어내지 못한 너의 잠언을 해독하는 일, 네가 밟아온 발자국들을 남김없이 헤아리는 일, 찡그린 이마에 파묻힌 번민의 무게를 재는 일, 눈금을 읽던 저울까지를 버리는 일. 또는 바짝 말라 있던 꼭지에 물기가 감돌게 하는, 숨어 있던 꽃봉오리를 허공으로 쑥쑥 밀어 올리는, 창백하던 하늘을 한순간 홍조로 물들이는, 캄캄한 숲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새의 문장을 끄집어내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게시기간 : 2020.08.30. ~ 09.05.) 1217 숲에 들면 윤현자 소나무 아래 떨갈나무 그 곁에 풀 한 포기 주어진 깜냥대로 영역을 다스리며 해와 달 구름까지도 나누면서 살아간다 크다고 우쭐대고 작다고 움츠리는 그런 세상 이젠 싫어 얽히고 설키어도 눈보라 속을 더불어서 가는거야. (게시기간 : 2020.08.23. ~ 08.29.) 1216 여름밤, 평상 위에선 이령 밥바라기 별이 상현의 소가 되는 저녁나절 엄마는 식구들의 불평을 토닥토닥 타일러 구름빵을 구워내곤 했다 중고교복을 입어야 하는 오빠의 퉁퉁거림과 표정을 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다는 아빠의 푸념을 익숙하게 반죽하는 엄마의 요리법에는 늘 효모성의 온기가 살아 있었다 달빛이 밤물 같은 어둠을 버무리면 여름밤, 평상 위에선 부풀거나 식은 얼굴들조차 빛이 났다 유성의 꼬리가 별의 내장을 가르면 모락모락 빵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빵이 풍선보다 부풀 땐 별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담장너머 시나브로 피기도 했다 식구들의 허기를 자분자분 다져 구워내는 연중무휴, 엄마의 구름빵은 지붕을 부풀리고 별들의 궤적을 끌어 모아 남루의 시절을 눈과 귀로 배부르게 했다 (게시기간 : 2020.08.16. ~ 08.22.) 1215 개구리 수영 김현주 수영을 배우려면, 온몸의 힘을 빼라는데 힘을 빼기가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지 무엇을 위해, 용을 쓰고 살았는지 생각 따로 가슴 따로, 힘을 쓰면 쓸수록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삶의 무게 연못을 가볍게 지치는 개구리가 목청을 돋운다 연잎 위를 또르르 구르는 물방울처럼 목의 힘을 빼라고, 개굴개굴 부풀어 오른다 그러고 보니 외발을 의지한 연꽃이 입김보다 가벼운 영혼의 무게로 허공을 받들고 청정하게 서 있다 (게시기간 : 2020.08.09. ~ 08.15.) 1214 목화꽃 기억들 김민자 하늘에 뜬 초저녁 별이 동생이 흘린 밥풀보다 더 많아 보이던 그 밥풀 같은 별 호박잎에 싸먹고 싶던 여름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상을 차리면 달빛과 별빛 풀벌레소리가 밥그릇으로 뛰어들었다 봉숭아 꽃잎을 싸맨 손톱에 첫 눈의 기다림이 반달처럼 남아있는 풋잠에서 빠져나와 잠결에 듣는 도마소리, 그 부엌에는 아직 내 곁을 지켜주는 어머니가 있다 내 기억의 집 목화꽃 같은 하얀 광목치마가 있고 배추를 뽑던 흙 묻은 손이 살고 있다 (게시기간 : 2020.08.02. ~ 08.08.) 1213 몸에서 가장 먼 곳 황수아 등허리에 상처가 났다. 혼자 약을 바를 수 없어 상처는 점점 곪아 갔다. 거울에 등을 비추고 고개를 한껏 돌린 뒤 내 몸의 가장 가엾은 자리를 보았다. 몸에서 가장 먼 얼굴과 몸에서 가장 먼 상처는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도록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마음의 가장 먼 곳을 차마 보여 줄 수 없었던 한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게시기간 : 2020.07.26. ~ 08.01.) 1212 식구 이병국 밥상에 김치찌개 올려놓고 불룩한 밥공기와 나란히 수저를 놓습니다. 마주함은 없어도 한 끼의 시장은 찬으로 다가옵니다. 한입 가득 숟가락을 머금고 다시 담아내는 손에 바람이 떨립니다. 네 귀퉁이에 놓인 상다리가 휘청댑니다. 꾹꾹 씹어 견뎌 냅니다. (게시기간 : 2020.07.19. ~ 07.25.) 1211 초여름 날의 단상 박혜범 인생이란 안고 가지도 못하고 업고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머물러 함께하지도 못할 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가는 것이다. 나그네가 강을 건넌 나룻배를 강가에 두고 가듯이 잠시 땀을 식힌 아름다운 정자를 두고 가듯이 그렇게 가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승에서 사랑하고 혹은 아꼈던 것들을 저승으로 가지고 갈 방법이 없으니 처음 빈손으로 온 그대로 다 놓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마음까지도 놓고 가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20.07.12. ~ 07.18.) 1210 봉숭아 꽃잎 돌절구 장옥관 벌초하고 잠시 둘러본 옛집 감잎 수북한 장독대에 작은 돌절구 하나 숨어 있다 경상도 사투리처럼 우둘투둘한 돌절구 서툰 솜씨가 파놓은 못생긴 얼굴 두 손바닥으로 받쳐 들고 보니 봉숭아 꽃잎 찧던 절구다 딸을 둔 아비가 틈날 때마다 파냈으리라 쌀보리도 콩도 아닌 봉숭아 꽃잎 찧으려 몇 날 며칠 공들여 파냈으리라 돌은 기꺼이 날 선 정을 맞았으리라 냇가에서 가장 둥글고 단단한 돌 골라 안고 오며 사투리보다 더 투박한 웃음 삼베 올 같은 웃음 검은 입술 위 흰 나비 되어 날아올랐으리라 웃음은 보조개가 되고 덧니가 되고 더러는 낮달이 되었으려니 분꽃도 과꽃도 없는 꽃밭 공이 없는 돌절구만 남아서 봉숭아 꽃물 아련한 그 마음 어루만지게 하느니 아득하여라, 여기 잠시 머물렀던 흰 나비들 도무지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게시기간 : 2020.07.05. ~ 07.11.) 1209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살다 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엘 오른다 해거름까지 오른다 오르다 보면 작은 묏새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서슬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떼 숨죽이는 것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게시기간 : 2020.06.28. ~ 07.04.) 1208 장마 장성희 빗방울 하나에도 떨어지는 이유가 있네 빗방울 하나에도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네 이렇게 하늘이 우는 날 떨어져 멍들은 꽃잎에도 흩어져 내리는 잎새들도 비와 비 사이 서러운 곡예일랑 우산일랑 접어놓고 온몸으로 잔을 드세 슬퍼 누운 꽃잎들에게 하늘이 베풀어주는가 씻김굿의 눈물 한마당 (게시기간 : 2020.06.21. ~ 06.27.) 1207 죽음 속에 눕다 송태옥 꽃동네에서 관체험을 했다 촛불 아래서 유서를 쓴 후 관이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관 뚜껑에 경첩을 단 하얀 오동나무관이 비로드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관 뚜껑을 열고 관에 들어가 바로 누웠다 내가 쓴 유서를 가슴에 얹고 몸 얼굴 전체에 검은 천을 휘덮자 뚜껑을 덮었다 고무 못을 네 귀퉁이에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 박는 소리가 저승사자의 발자국 소리로 들렸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의식만 또렷이 되살아났다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생이라더니 살아온 삶의 흔적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없는 텅 빈 어두운 공간 관 속에 나 혼자 맨몸으로 누워 있었다 살아 꿈틀거리던 모든 욕망들이 죽음 앞에서 맨몸 하나로만 남아 있었다 산다는 게 몇 근의 허망한 살덩어리일 뿐이었다 순간, 관 뚜껑이 열리고 나의 영정이 놓인 방으로 갔다 검은 띠를 두른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며 죽은 내가 나의 유서를 읽어보았다 나를 얽어맨 삶의 끄나풀들 내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한 장의 가벼운 종잇장이었다 한줌의 재가 되어 연기로 날아오르는 유서를 보며 죽음이란 나를 버리는 것이었다 나를 버리고 가장 나다운 나만이 살아남는 것이었다 (게시기간 : 2020.06.14. ~ 06.20.) 1206 긍정의 풍경 오영록 마을버스를 타면, 앉은 사람이나 선 사람이나 모두 긍정의 풍경이 된다 아무리 완강했던 부정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끄덕끄덕 긍정의 풍경이 된다 덜컹거릴 때마다 급정차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긍정 다소곳하게 단전에 합수하고 꼬고 앉은 불량한 다리로도 긍정 옆 사람 어깨를 빌려서 하는 의존형도 있고 침까지 흘려야 하는 몰입형 긍정 목젖이 다 보이도록 떡 벌리는 꼴불견형 긍정 가끔 너무 몰입하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 지나치는 연체형 긍정 탈 때부터 시작하는 절대 보수파 긍정 부정할 줄 모르는 긍정형 긍정 마주앉아 서로에게 끄덕끄덕 예(禮)를 다하는 것이 진정한 긍정의 풍경이다 (게시기간 : 2020.06.07. ~ 06.13.) 1205 들꽃 이광석 남을 밀어내고 피는 꽃도 있지만 제 노동으로 피는 꽃도 있습니다 남의 텃밭을 넘보기보다는 제 힘으로 피는 꽃들도 있습니다 크고 화사한 꽃들이 침묵할 때 작아도 할 말 다 하는 당찬 꽃들도 있습니다 밟히면서 아파하면서 이 땅의 토박이들. 크고 화사한 어떤 꽃도 그려낼 수 없는 야성(野性)의 생명력 하나로 세상의 아침 밥상을 차리는 눈꽃, 혹은 조선의 여인 같은 억세고 질긴 다부진 꽃, 당신의 이름은 들꽃입니다 (게시기간 : 2020.05.31. ~ 06.06.) 1204 낙화 백창일 지는 햇살이 고운 것은 더 큰 바다를 물들이기 때문이지요 너나 없이 떠올라 출렁이는 바다 위에 푸른 별들을 띄우기 위함이지요 썩지 않는 말(言)들이 둥근 해가 되어 풍경을 지우는 이 세상에, 지는 꽃잎이 더 아름다운 것은 젖은 발자국을 덮어주기 때문이지요 오직 낮은 데로 흐르고 흘러 지상의 길들을 물들이기 위함이지요 (게시기간 : 2020.05.24. ~ 05.30.) 1203 눈을 작게 뜨면 전원범 몸을 낮춰서 바라보면 작은 것들이 다 보인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 개미새끼도 짚신벌레도 무당벌레도 자벌레까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것 눈을 작게 뜨고 바라보면 가까이 있는 것들 다 보인다 멀리만 보느라 보지 못한 것들 맺히는 이슬 벙그는 풀꽃 작은 돌맹이 돋는 싹 하나 사랑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게시기간 : 2020.05.17. ~ 05.23.) 1202 검색 오성일 벌들도 가끔 부부 싸움 하는지 꽃들에게 물어보렴 어떤 감자는 왜 자주꽃을 피우는지 농부에게 물어보렴 바람도 잘 때 잠꼬대를 하는지 떡갈나무 잎들에게 물어보렴 예쁜 아가씨를 지나칠 땐 새들도 날갯짓을 늦추는지 구름에게 물어보렴 해가 바다에 잠길 때 신을 벗는지 안 벗는지 노을에게 물어보렴 비 오는 날 그림자들은 어디 선술집에라도 몰려가는지 빗방울에게 물어보렴 겨울밤 지하철 계단 할머니의 다 못 판 채소는 누가 사주는지 별들에게 물어보렴 궁금한 것 죄다 인터넷에 묻지 말고 (게시기간 : 2020.05.10. ~ 05.16.) 1201 하류 김구식 울 만큼 울었다 생각할 때 강물은 어느덧 바다에 닿아 있었다. 온갖 이유를 달고 밀려서 내려온 강물은 바다의 저 큰 함성이 자신의 울음과 다르지 않음에 놀랐다. 세모고랭이 풀이 강이 끝나는 곳에 밀집하여 잠시 고개 돌릴 여유를 주면 먼 섬의 산봉우리를 넘어갈 때의 해가 가장 아름다운 이유를 아프게 느끼는 것이었다. 되돌아 갈 곳이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다는 것도 되돌아 갈 수 없을 때야 알아낸 것이었다. 외롭다고 수없이 되뇌었었지 정말 외로워지는 때는 외롭다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두려워지는 그때라는 것을 그립다 그립다 노래 불렀지 그건 오히려 행복이었어 정말 그리워지는 때는 아무 것도 그리워할 것이 남아있지 않은 그때라는 것을 이제 누구든 저 넓은 바다에 섞여져서 잊혀져야 할 순간만이 남았을 때 내 발로 걸어온 게 아니라 떠밀려 왔다는 사실에 고개 숙이게 되지 흐름인지 출렁거림인지도 모르는 하류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되지 (게시기간 : 2020.05.03. ~ 05.09.) 1200 가족 최범영 아플 때 아프다 말할 수 없으면 가족이 아니다 기쁠 때 기쁘다 말할 수 없으면 가족이 아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만으로는 가족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아픔과 기쁨과 사랑 함께 나누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래 참아주며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두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 슬플 때 슬픔을 나타낼 수 있고 웃다가도 함께 울 수 있어야 가족이다 기쁠 때 기쁨을 나타낼 수 있고 울다가도 함께 기뻐해줄 수 있어야 가족이다 멀리 있어도 한 이불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야 가족인 것이다 (게시기간 : 2020.04.26. ~ 05.02.) 1199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굵은 글씨로 써내려가리라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갈지라도 나 그 빗물 되어 사랑했었다고 소리치리라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오랜 침묵 뒤 저 금빛 저무는 산 한 그루 나무가 되리니 누구보다 먼저 아름다운 시절 사랑했었다고 목이 메는 갈매기도 세월은 늘 물결 부서지는 암초더미에 걸려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푸르게 푸르게 울고 있듯이 슬픔이 다하는 날 나 돌아보지 않으며 나, 이 아름다운 시절 사랑하며 이곳을 떠난다고 길모퉁이 지워지는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이여 연인이여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간다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이른 아름다운 시절이 (게시기간 : 2020.04.19. ~ 04.25.) 1198 봄 생각 정완영 어젯밤 도란도란 상추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 텃밭에는 파란 싹이 돋아났네 언제쯤 예쁜 속잎이 나비만큼 자랄까 엄마손 돌아간 데 어찌 아니 물오르랴 우물가 향나무도 장독대 밑 꽃밭에도 우리 집 장닭 꼬리도 윤이 잘잘 흐른다 하룻밤 자고 나면 하루만큼 봄이 오고 아버지는 밭갈이에 맨발 벗고 나섰는데 이 봄에 나는 뭘 할까 캘린더도 환하다 (게시기간 : 2020.04.12. ~ 04.18.) 1197 살구꽃 문신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게시기간 : 2020.04.05. ~ 04.11.) 1196 산벚꽃을 보며 전재승 황사 바람 부는 봄날 가까이 또는 멀리 보이는 산에 산벚나무 여기저기 꽃을 피우니 가뜩이나 흐린 풍경이 환하게 밝다 쉰 살에 접어들면서 머리털이 약쑥같이 희어진다는 옛말처럼 내 머리에도 산벚나무 꽃이 피었다 거울 속의 시간과 공간을 상깃상깃 밝히면서 하얗게 세어가는 머리칼을 보며 저만큼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해 본다 산벚나무 연분홍 꽃을 피워 봄 한철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나이 오십에 공자는 천명(天命)을 알았다는데 어쩌다 밤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밤에 내 영혼도 저리 환한 꽃을 피울 것인가 산벚나무 가지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게시기간 : 2020.03.29. ~ 04.04.) 1195 진달래 꽃 윤광석 기나긴 아픔을 삼키고 피어난 진달래 꽃 그래서 꽃망울도 멍이 들었나? 아픔 없이는 꽃을 피울 수 없기에 온 겨울 아픔을 이겨내고 피었다. 이겨냈기에 견디어 냈기에 환하게 웃고 있는 진달래. 그 꽃 하나 피우기 위해 진달래는 갖은 눈보라의 행패도 참아 왔던 게 아니었나. 세상을 더 아름답게 수놓고자 기쁨 없는 인생들 가슴에 희망을 하나 가득 선물 하고자 기나긴 날 눈물로 싹을 틔워 아름다운 꽃 문을 열었다 얼굴 가득, 밝은 미소 머금고 (게시기간 : 2020.03.22. ~ 03.28.) 1194 돌 하나 주워 강에 던지며 최원 바람 부는 저녁 강 다리 위, 외로운 사람 하나 서자 가로등이 아침에 접은 제 생을 펼쳐들고 어둠을 털어내며 흐르는 물비늘의 배후로 선다 잠시 일렁이다 사라질 것들이 도마 위 쳐내린 물고기 비늘처럼 겹겹이 밀리며 배후 없는 어둠 저편으로 사라진다 밀려나지 않으려는 마음의 배후 몸 바닥에 켜로 누워있는 미련의 삶 하나 일으켜 세워 세월의 사진첩 속에 끼워 흐린 눈으로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본들 해 오름에 져야하는 가로등 밑 돌 하나 주워 강에 던지며 가라앉음의 배후조차 묻지 못하는 가엾은 사람 하나 강바람에 머리카락만 쓸어올리며 서있다. (게시기간 : 2020.03.15. ~ 03.21.) 1193 결이라는 말 문성해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다는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 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결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물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게시기간 : 2020.03.08. ~ 03.14.) 1192 이사를 하며 송태한 이사를 하며 나는 몇 번을 놀랐다 저 많은 이삿짐들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가끔은 진귀한 골동품을 찾아낸 듯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고 문득 웃음을 흘렸다 바닥을 긁던 밥솥처럼 오랫동안 정들었던 살림이 있는가하면 한 번도 못쓰고 묵혀 둔 낚시용품까지 한 때는 모두 애지중지 아꼈던 것들 없으면 못살 것 같던 마음들이 창고와 벽장 틈에서 마술 상자처럼 쏟아져 사다리에 실려 트럭으로 옮겨 타고 있었다 어떤 물건은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도 하고 때로는 가구 뒤편에서 빛바랜 책 묶음이 아직 살아있다고 외마디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가 손대면 다시 눈을 깜빡이는 추억처럼 소싯적 핏대 세우며 굽히지 않거나 청춘만큼 절절했던 모나고 날 선 신조까지 이제 진정 송두리째 내려놓거나 내 몸으로부터 멀찌감치 작별해야할 헐고 묵은 짐, 버려질 이삿짐이 되어버려 나는 세간 사이에서 남몰래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게시기간 : 2020.03.01. ~ 03.07.) 1191 지구 박용하 달 호텔에서 지구를 보면 우편엽서 한 장 같다. 나뭇잎 한 장 같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저 별이 아직은 은하계의 오아시스인 모양이다. 우주의 샘물인 모양이다. 지구 여관에 깃들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만원이다. 방이 없어 떠나는 새· 나무· 파도· 두꺼비· 호랑이· 표범· 돌고래· 청개구리· 콩새· 사탕단풍나무· 바람꽃· 무지개· 우렁이· 가재· 반딧불이…… 많기도 하다. 달 호텔 테라스에서 턱을 괴고 쳐다본 지구는 쓸 수 있는 말만 적을 수 있는 엽서 한 잎 같다 (게시기간 : 2020.02.23. ~ 02.29.) 1190 친구가 되기 위해서 허명희 도토리도 딱딱한 껍질을 벗어야 말랑말랑한 맛나는 묵이 되는 거야 밤도 가시옷을 벗어야 겨울 군밤이 되어 사람들 마음을 녹이는 거야 호두를 봐 딸딸한 껍질 속에 오글오글 모여 앉은 고소한 속살 너랑 나랑 친구가 되기 위해서도 이런 껍질을 벗어야 돼 그래야 따듯한 마음이 나와 손을 잡게 되지 (게시기간 : 2020.02.16. ~ 02.22.) 1189 집을 지킨 건 대문이 아니었다 정이경 고향집에 가게 되었다 퇴원한 어머니와 함께 동네 분들이 기다렸다는 듯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오신다 한결같이 얇은 몸피를 가졌거나 유모차에 의지한 영락없는 ㄱ자 모양새다 병원에 가보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단다 주름들끼리 더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 안부와 걱정을 길게 나누시고 위로에 위로가 넘쳐나던 그해 여름 오늘은 왔을까 하고 앞집 사람이 다녀가고 이제는 오지 않았을까 하고 뒷집 사람이 왔다 갔단다 어머니 안 계신 집에 검은 대문이 지킨 게 아니었구나 (게시기간 : 2020.02.09. ~ 02.15.) 1188 환해진 방 배산영 의자 위에 까치발로 서서 전구를 갈아 끼우는 아버지 낡은 구두 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하얗게 굳은살 박인 알전구 같은 아버지의 발뒤꿈치가 보인다 지금까지 어두운 골목길을 얼마나 걸으셨으면 우리의 방을 밝혀 준 건 저 천장의 전구만이 아니었구나 침침했던 방이 환해진다 (게시기간 : 2020.02.02. ~ 02.08.) 1187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박강균 우당탕 쿵탕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무엇이 재미있는지 마냥 웃는다 안절부절 노심초사 나를 살피는 눈동자를 뒤로 하고 종횡무진 좌충우돌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무엇을 하려는지 귀를 기울인다 벙어리 냉가슴 나 대신 타는 속 뒤로 하고 이제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안다 자식을 살피는 두 눈동자와 잘되기를, 바르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이만큼 나를 성장시켰음을 또 이제 그만큼 나를 아프게 함을 (게시기간 : 2020.01.26. ~ 02.01.) 1186 자갈치 밥집 손순미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워주는 식당을 찾아갔다 생선 좌판을 지나 건어물 가게를 지나 사내 하나가 허겁지겁 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등어가 익어가는 동안 허술한 생각을 비워가는 동안 주인은 그에게 펄펄 끓는 시락국을 먼저 내주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지 않으려면 국은 저렇게 뜨거워야 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끼리 익숙한 듯 밥을 먹는다 낯선 사람끼리 쓸쓸함을 비벼먹는다 비린내를 풍기며 기름내를 풍기며 어떠냐며 스스럼없이 마주 앉아 서로의 심장을 데운다 고등어 자반이 사천 원이라는 것 누구나 추웠던 한 때를 기억한다는 것 사람들은 연탄불 같은 주인 여자를 실컷 쬐고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서 가장 맑은 식사를 마친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간다 대 여섯 평이 될까 싶은, 연탄화덕이 간판인 그곳이 그들의 몸을 오래도록 지나간다 (게시기간 : 2020.01.19. ~ 01.25.) 1185 찌개 신춘희 가격이 착한 고깃집에서 먹는 찌개를 좋아합니다 숯불 위에 올린 양은 냄비 얼큰한 국물에 듬성듬성 김치를 넣고 끓여 먹는 목살 시래기에 매콤한 양념을 넣고 졸이는 고등어찌개 냉이 달래가 품은 햇봄을 가득 넣은 된장찌개 식당을 두리번거리는 눈에는 네모난 메뉴판만 보입니다 국물이 있는 요리를 골라 먹는 건 나만의 식견입니다 혀 밑에 똬리를 튼 미각의 샘 손끝으로 차린 밥상 위에는 종잇장에 적어놓은 기밀문서가 조금씩 벗겨지기도 합니다 부대끼며 먹는 말은 진공 포장이 되어 있고 명치끝에 쌓인 응어리는 급랭을 시킵니다 삼킬 수 없어 역류되기도 한 재료들을 모아 천천히 녹입니다 유통 기간이 없는 삶의 찌개에 대파를 송송 뿌려 줍니다 적당한 불에 은근히 졸여야 인생도 제 맛이 납니다 (게시기간 : 2020.01.12. ~ 01.18.) 1184 지금 김언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1183 노래 윤지용 1. 새날 새아침 우리는 늘 새날 새 아침을 노래한다. 노래하고 싶어 살아간다. 2. 해 새날 새 아침은 해의 날이다. 달, 별보다는 아무래도 해를 바라보고 노래함이 더 희망적이다. 3. 산 산은 점잖다. 점잖게 앉아 있어 산은 언제나 산이 된다. 산을 닮아야 하는 것은 청소년에게 있지만 나이 들어 산은 비로소 산으로 보인다. 산아, 우리의 산아 산으로 앉아 산처럼 사는 산, 산, 산아... 4. 강 강은 바다보다 넓지 않아서 좋다. 강은 강으로 남아 언제나 강으로 흐른다. 누구나 강에 나오면 쉽게 맨발이 되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나 우리의 아들을 이어 이웃을 만든다. 제 모습 제 노래로 흐르는 강은 바다처럼 넓지 않아서 제격이다. 5. 고향 마을 고향 마을에 다다르면 눈물이 난다. 봄바람이 눈에 든 듯 자꾸자꾸 눈물이 난다. 살구꽃 핀 마을 어귀에서 목놓아 울음 울던 우리의 어린시절 석이, 용이 그리고 순이야 이 땅의 작고 어린 풀잎들아...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길 왠지, 까닭모를 눈물이 난다. (게시기간 : 2019.12.29. ~ 2020.01.04.)


3-24.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20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