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9 년
 

   2019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익스플로러 단축키(Ctrl+F)로 시 제목, 내용, 시인 이름을 검색(?) 할 수 있습니다.  ^^;

1170 애기똥풀꽃 권달웅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에 뛰어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 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한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혼자 안간힘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조용해, 저기 사람이 왔어 살다보면 삼라만상의 복잡한 일 중 더러운 일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처럼 참으로 어려운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 속의 노란 애기똥풀꽃이 웃었다 (게시기간 : 2019.09.29. ~ 10.05.) 1169 구름 정근 저 멀리 하늘에 구름이 간다 외양간 송아지 음매음매 울 적에 어머니 얼굴을 그리며 간다 고향을 부르면서 구름은 간다 저 멀리 하늘에 구름이 간다 뒤뜰에 봉숭아 곱게곱게 필 적에 어릴 제 놀던 곳 찾으러 간다 고향을 그리면서 구름은 간다 (게시기간 : 2019.09.22. ~ 09.28.) 1168 손톱 고현숙 손톱을 깎는다. 하얗게 낮달을 띄워놓고 내 몸에서 자라난 손톱을 자른다 손끝에서 잘려나간 손톱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 붉은 백일홍을 배경으로 그대는 하이얗게 웃고 있다만 하늘에는 양떼구름이 흐르고 눈부신 햇살이 빛나고 있다만 그대를 안았던 뜨락 위로 백일홍을 닮은 노을이 피어나고 여름이 끝난 저편에 서 있는 낯선 그대여 화르륵 화르륵 백일홍 지는 소리를 들으며 웃고 있는 그대를 잘라낸다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파알랑 파알랑… 발그스름한 그대 미소가 떨어진다 손톱 밑 살점이 잘려나가고 붉은 꽃 한 송이 피어난다 열 손가락 가득 꽃잎이 날린다. (게시기간 : 2019.09.15. ~ 09.21.) 1167 오만원 윤중목 오랜만에 서울 올라 와 만난 친구가 이거 한번 읽어보라며 옆구리에 쿡 찔러 준 책 헤어져 내려가는 고속버스 밤차 안에서 앞뒤로 뒤적뒤적 넘겨 보다 발견한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구깃한 편지봉투 하나 그 속에 빳빳한 만 원짜리 신권 다섯 장 문디 자슥 지도 어렵다 안 캔나! 차창 밖 어둠을 몰아내며 버스는 성을 내듯 사납게 내달리고 얼비치는 뿌연 독서등 아래 책장 글씨들 그렁그렁 눈망울에 맺히고 (게시기간 : 2019.09.08. ~ 09.14.) 1166 오늘 오현정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첫 해산 후 숲길 걷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이제까지의 부끄러움 다 가려주는 활엽수가 친구하자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오후의 햇살이 남은 꿈을 찾아드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 나는 어리석었지만 지혜를 찾아다닌 시인 지금 이 순간이 고통의 시를 빚는 행복한 시간 먼 길 돌아 다시 출발점에 서있는 지금 여기 그대 함께라면 오늘이 내 가장 좋은 때 (게시기간 : 2019.09.01. ~ 09.07.) 1165 낙서 이제민 하얀 종이 위에 아무런 느낌도 없이 써 내려간 꾸불꾸불한 글씨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드러내 듯 백지 위에 끝없이 풀어놓는다. 희미하게 보이던 그 모습도 한 올처럼 점점 또렷하게 보이고 나에겐 하나의 작품인 것을 타인은 '낙서'라고 한다. (게시기간 : 2019.08.25. ~ 08.31.) 1164 나무의 경지 정병근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게시기간 : 2019.08.18. ~ 08.24.) 1163 버스 정류장에서 김영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초조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 정류장이 변경된 것을 모르고 있다 결국, 눈이 빠지게 헛된 시간을 보내다가 어떤 이는 투덜대며 돌아가고 어떤 이는 미련을 못 버리고 조금만 더 기다리기를 계속한다 인생 나그네길 가는 동안 내게 오지 않는 행운을 바라며 오늘도 돌아서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어리석은 우리들이 계속 서성대고 있었다. (게시기간 : 2019.08.11. ~ 08.17.) 1162 더위 심종은 사방 돌아다니며 쪽문까지 열어 젖혀도 해갈되지 않는 찜통 더위라 땡볕에 주춤거리기만 해도 비오듯 쏟아져 내리는 구슬땀. 아무리 서늘한 바람 그리워 길 떠나도 인파에 떠밀리면 더위만큼이나 솟아나는 짜증. 복중에 옷을 낱낱이 벗어도 속 시원하지 않는 것은 인간 스스로 저질러 놓은 자연파괴와 물질 문명의 발달이 원인 제공한 오염 공해가 복합되어 이상난동 현상을 가져온 세상 탓이리. 찬물에 발 담그고 얼음수박 한 입 가득 깨무는 것이 유명 해수욕장을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좋은 차라리 속 편한 나만의 유일한 피서법이리. (게시기간 : 2019.08.04. ~ 08.10.) 1161 서투른 새, 노련한 새 방우달 떠날 때를 보면 떠나고 난 후에 보면 떠난 새가 제대로 보인다. 서투른 새는 나뭇가지를 요란하게 흔들고 떠난다. 떠난 후 가지가 한참 흔들린다. 노련한 새는 가지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모르게 흔적도 없이 조용히 떠난다. 떠나가도 늘 앉아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가지에게 포근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게시기간 : 2019.07.28. ~ 08.03.) 1160 신록 이영균 눈이 시린 파란 하늘 하늘 이고 선 우뚝한 산 푸르름 잔득 쌓아놓은 싱그러운 초록의 숲 환하게 웃고 있는 맑은 햇살 깊은 숲 속에 숨어 핀 작은 들꽃들 잎새에 맺혀 있는 영롱한 작은 이슬방울 지루한 장마가 끝난 칠월 한여름은 그렇게 상큼한 환한 웃음이었다. (게시기간 : 2019.07.21. ~ 07.27.) 1159 받아쓰기 임영석 내가 아무리 받아쓰기를 잘 해도 그것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 백일홍을 받아쓴다고 백일홍꽃을 다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아쓴다고 사랑을 모두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받아쓴다는 것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일 뿐, 나는 말의 참뜻을 받아쓰지 못한다 나무며 풀, 꽃들이 받아쓰는 햇빛의 말 각각 다르게 받아써도 저마다 똑같은 말만 받아쓰고 있다 만일,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불러주고 아이들이 각각 다른 말을 받아쓴다면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햇빛의 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말 말고 받침 하나 넣고 빼는 말 말고 모과나무가 받아 쓴 모과 향처럼 살구나무가 받아 쓴 살구 맛처럼 그런 말을 배워 받아쓰고 싶다 (게시기간 : 2019.07.14. ~ 07.20.) 1158 장마 한승수 습한 바람이 불고 어두운 하늘에서 종일 비가 내린다. 장마의 긴 터널로 들어가고 있나 보다. 장마는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아내의 부재 속에서 집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쌓이고 고장난 세탁기에는 던져 놓은 빨래가 산더미 같다. 한나절이면 음식은 썩어 나가고 저녁이면 멍하니 빈 창가에 앉아 TV를 켜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제 나는 맑은 날 틈틈이 빨래를 말리며 햇볕의 소중함을 느낄 것이다. 습기에 상해가는 생의 의욕을 추스르면서 햇볕보다 더 소중한 아내의 귀가를 기다릴 것이다. (게시기간 : 2019.07.07. ~ 07.13.) 1157 누가 그랬다 이석희 누가 그랬다 풀잎에서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고 가끔은 이성과 냉정 사이 미숙한 감정이 터질 것 같아 가슴 조일 때도 있고 감추어둔 감성이 하찮은 갈등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가쁜 숨을 쉬기도 한다 특별한 조화의 완벽한 인생 화려한 미래 막연한 동경 누가 그랬다 상처없는 사람은 없다 그저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안아 주는거다 (게시기간 : 2019.06.30. ~ 07.06.) 1156 귀한 인연이길 유해정 진심어린 맘을 주었다고 해서 작은 정을 주었다고 해서 그의 거짓 없는 맘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깊은 정을 받았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깊은 사랑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한동안 이유 없이 연락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를 아끼는 만큼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쉽게 포기하는 그런 가볍게 여기는 인연이 아니기를.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게시기간 : 2019.06.23. ~ 06.29.) 1155 사진 속의 나를 보며 정군수 저 사진 속의 말없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 이 순간 이 사진을 보고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그때는 거기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없는 사람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다시는 거기에 갈 수 없는 사람 침묵에 갇힌 저 사람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나를 떠나 얼마나 먼 시간을 돌고 왔기에 나의 진실은 말라만 가고 나의 허상은 불어만 가고 얼마나 먼 시간을 떠나왔기에 너한테 소리쳐 갈 수 없고 너한테 온기를 전할 수 없고 그때는 거기에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없는 사람 네 안에 나를 키울 수 없는 사람 (게시기간 : 2019.06.16. ~ 06.22.) 1154 초여름의 풍경 김재혁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게시기간 : 2019.06.09. ~ 06.15.) 1153 희망을 자주 발음해야 하는 이유 김선호 희망 하고 발음을 한다 벌어진 꽃잎이 잘 여문 씨앗 몇 톨 움켜쥐듯 내 입술은 피어나는 꽃잎이 된다 끝하며 앙 다물어지는 입술과는 달리 마앙 하며 벙긋이 벌어진 입 속으로도 무언가 다시 들어 올 것만 같다 희망 희망 하다보면 잿빛 울타리를 벗어난 내가 장미정원에서 열린 파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고 포물선을 그리던 주식이 수직상승 하기도 한다 희망 하고 길게 발음을 한다 판도라의 상자와 못 다한 사랑 새벽하늘의 별 하나가 내 앞을 스친다 누가 내게 "희망적이야"라고 말을 해도 내 입 끝은 6월의 모란꽃만큼 벌어진다 (게시기간 : 2019.06.02. ~ 06.08.) 1152 행복은 짧다 이남일 꽃잎이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행복은 짧은 법이다. 꿈을 위해 말없이 행복을 떨구는 꽃잎은 누구보다 아름답다. 물길을 딛고 선 뿌리와 사철 햇살을 이고 사는 푸른 잎들도 하루 꽃을 위해 몸을 던진다. 행복이 짧다고 슬퍼하지 마라. 밤새워 쓰던 긴 편지보다 만남의 기쁨은 짧지 않던가. 우리가 가는 길이 그러하듯이 언제나 꿈보다 행복은 짧은 법이다. (게시기간 : 2019.05.26. ~ 06.01.) 1151 고추장 단지를 들여다보며 한미영 베란다 청소를 끝내고 마지막 설거지로 고추장 단지를 열어본다 스텐 국자가 휘어지도록 내용물들 딱딱하게 굳어있다 남을 향해 경직된 사람 속이 이러할까 나는 단지 속을 들여다보며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경직 돼 있던 내 딱딱하게 굳은 속이 저러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떡볶이를 볶을 때이거나 부추 비빔밥을 힘들여 비빌 때의 매콤한 맛이 사리처럼 단단한 아픔 한 조각이 그 순간 내 목젖을 치고 넘어간다 울분 덩어리 삶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식욕보다 강한 희망 같은 게 있었구나 하면서 생수 한 바가지를 단지 속에 붓는다 더깨가 진 시간들은 베란다 밖 질척거리는 세상으로 떠 내 버리고 마음 다 말라버린 몸 속에 다시 마음을 쟁여 넣듯 삐득삐득 말라버린 독 속의 장에 생수를 비벼 섞는다 언젠가 저 응어리진 마음이 축축하게 풀릴 날을 생각해 본다 (게시기간 : 2019.05.19. ~ 05.25.) 1150 찔레꽃 차성우 동산에 오르면 찔레꽃 향기 꽃잎마다 미소짓는 그대의 얼굴 행여나 오실까 뒤돌아보면 보리밭 종달새만 노래부르고 어느 세상 아득한 동리 그대 사는가, 꽃잎만 하얗게 짙어가누나. (게시기간 : 2019.05.12. ~ 05.18.) 1149 엄마의 품 이주홍 새들이 그렇게 많이 날아도 구름이 그렇게 멀리 떠가도 그런 것은 다 하늘 안에 있는 것같이 이 세상에 어머니보다 큰 것은 없지 사랑도 미움도 그 안에 담기는 자랑도 허물도 그 안에 묻히는 어머니보다 큰 것은 없지 사랑도 미움도 그 안에 담기는 자랑도 허물도 그 안에 묻히는 높다가 높다가 끝간 델 몰라 파랗기만 한 파랗기만 한 저 하늘 같은 엄마의 품 (게시기간 : 2019.05.05. ~ 05.11.) 1148 안부 윤진화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세계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읊조립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 속에 가득한 혁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답장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나도 당신처럼 시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부끄럽지 않게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게시기간 : 2019.04.28. ~ 05.04.) 1147 소풍 손정휴 어머니가 챙겨주신 말표 사이다 한 병 보자기에 꼿꼿이 세우고 선생님께 드릴 희망 담배 두 갑 그리고 촘촘한 김밥 한 줄이면 내 생애 가장 두둑한 목록이었지요 돌아올 땐 빈병 가득 노을 한 줄기 가방 속엔 찰랑이는 솔잎 바람 가슴 안엔 또래들 웃음 한 다발 살짝 부딪혔던 선생님의 검지 관절 온기의 기억만으로 닷새는 행복했었지요 (게시기간 : 2019.04.21. ~ 04.27.) 1146 라일락 향기 장미숙 달빛은 온 밤 길에 라일락 향을 뿌려 놓았다 골목 옆 집집마다 불꺼진 창 틈에도 향기를 밀어 넣는다 라일락 향은 내 머리카락에 배어 골목 어귀까지 따라 오다 달의 손에 끌려갔다 나는 사월의 밤아, 밤아, 하고 눈부신 라일락나무 아래서 그리움을 부른다 (게시기간 : 2019.04.14. ~ 04.20.) 1145 산을 오르며 강진규 산을 오르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웁니다 사무치는 바람소리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가는 소리 들어봅니다 세월의 찌꺼기 이내 바람에 부서집니다 바람소리에 폭우처럼 떨어지고 내 마음에도 부서져 폭우처럼 비웁니다 산을 둘러앉은 한줄기 내일의 그리움을 밟고 한줄기 그리움으로 산을 오릅니다 구름처럼 떠서 가는 세월 속에 나도 어느새 구름이 됩니다 소리 없이 불러 보는 내 마음의 내일 적적한 산의 품에 담겨 내 생각은 어느새 산이 됩니다 산을 오르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꿈을 꿉니다 홀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산의 그리움을 배웁니다 (게시기간 : 2019.04.07. ~ 04.13.) 1144 산벚꽃 그늘 아래 - 취밭목 권경업 저건 소리 없는 아우성 같지만 실은, 너에게 보이려는 사랑한다는 고백이야 생각해 봐 저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그것도 겨울밤을, 비탈에 서서 발 동동 구르며 가슴 졸인 줄 생각해 보라구 이제사 너가 등이라도 기대주니까 말이지 저렇게 환히 웃기까지의 저 숱한 사연들을, 고스란히 몸 속에 품어두었던 그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생각해 보면, 뭐 세상 별것 아니지만 먼 산만 싸돌아다니던 너가 그저, 멧꿩 소리 한가한 날 잠시 옆에 앉아 낭낭히 시라도 몇 줄 읽어주며 "정말 곱구만 고와" 그런 따뜻한 말 몇 마디 듣고 싶었던 거라구 보라구, 봐 글쎄, 금방 글썽글썽해져 꽃잎 후두둑 눈물처럼 지우잖아 (게시기간 : 2019.03.31. ~ 04.06.) 1143 진달래를 보며 이미순 나지막한 산자락 듬성듬성 하던 진달래가 사방으로 피어나고 속내를 감추지 못한 여린 꽃잎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지난날 애틋하게 남아 있는 추억들이 이제는 너무나 아득해서 기억에도 없을 것이라고 이름마저 서먹해서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꼭 그럴 것만 같았는데 산마루를 향해 번지는 분홍빛 꽃잎처럼 내 안에 갇혀 있던 그리움도 함께 피어나고 있다. (게시기간 : 2019.03.24. ~ 03.30.) 1142 혼자 먹는 밥 오규태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 돋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 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 맛 없다 (게시기간 : 2019.03.17. ~ 03.23.) 1141 이제야 마주한 사랑 김종성 먼 세월 홀로 지나다 이제야 마주한 사랑 앞에 그리움에 저려오는 가슴 별에 이르는 길을 가는 경건함으로 혼을 찍어 쓰는 당신을 향한 사랑 당신 그리다 멍울 진 가슴에 깊은 밤 홀로 흐르는 실핏줄 흐르는 실핏줄 멈춘 끝자락은 오늘도 알 수 없는 당신의 가슴 한복판 당신 그리다 하얗게 바스라지는 심장 애간장 녹는 그리움 담은 가슴에 넘치도록 떠오르는 당신의 옆얼굴 어둠 밝히는 미소가 피는 아스라한 당신 얼굴 위로 흐르는 내 안타까운 시간의 아픔 샛강 강변에 핀 버들강아지 솜털 위에 내려앉는 햇살처럼 향기로운 미소가 머무는 당신이 계시기에 긴 세월 홀로 지나다 이제야 마주한 사랑으로 조용히 일어서는 행복 목숨 다 하는 날까지 같이 가고 싶은 사랑. (게시기간 : 2019.03.10. ~ 03.16.) 1140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 심현보 나는 '온다'라는 말을 좋아해. 비가 온다. 눈이 온다. 아침이 온다. 봄이 온다.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들 있잖아.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들. 아마 그런 모든 것들을 사람들은 '온다'라고 얘기하나봐. 사랑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도대체 언제쯤일지 목을 빼고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 순간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 아무리 막아보려 애쓰고 애써도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 아무 준비 없이 소나기를 만나거나 단 하루 사이에 거짓말처럼 봄을 만나는 것처럼. (게시기간 : 2019.03.03. ~ 03.09.) 1139 내 집이 천국이다 김길남 근 한 달여를 밖으로 나가 말도 통하지 않는 다른 세 나라에서 끼니때면 김치도 없는 밥을 먹고 날이면 날마다 일정 맞추느라 모닝콜 소리에 잠도 맘대로 못 자고서 이곳저곳 졸린 눈 비벼가며 돌아다니다가 어젯밤 집에 와 푹 잤더니만 이토록 평안함 있으랴 아 여기 내 집이 천국일세 천국 (게시기간 : 2019.02.24. ~ 03.02.) 1138 소금 김지나 마음 상하지 말라고 아침에 일어나 가슴 속에 가득 소금을 뿌리고 나섰다 살아가면서 제 맛 그대로 내고 살 수 없기에 처음처럼 신선한 채 남아 있을 수 없기에 쓰라린 줄 뻔히 알면서도 한 됫박 소금을 푸는 출근길 아침 오늘도 퇴근 무렵이면 간간하게 절은 가슴 위로 삶의 맛이 배어들었겠다 (게시기간 : 2019.02.17. ~ 02.23.) 1137 골목이라는 말 속엔 김지헌 골목이라는 말은 얼마나 따뜻한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누군가 내다버린 연탄재처럼 다친 무릎에 빨간약 발라주던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골목이라는 말 속엔 기다림이 있다 벚나무 아래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둠이 먹물처럼 번지는 시각 생 무를 깎아먹는지 창밖으로 도란도란 들리는 목소리 골목이라는 말 속엔 아이들이 있다 너무 늙어버린 골목이지만 여전히 몽환 같은 밤을 낳아 여자들은 열심히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쑥쑥 커서 누군가의 애인이 되어 역사를 이어가는 골목의 불멸 사소한 것들이 모여 사랑이 이루어지듯 때론 박애주의자 같은 달빛이 뒷모습까지 알몸으로 보여 주는 절망과 희망이 번갈아 다녀가는 골목 (게시기간 : 2019.02.10. ~ 02.16.) 1136 엄마가 된다는 것 이성이 어느 날 글쎄 내가 아이들이 흘린 밥을 주워 먹고 먹다 남은 반찬이 아까워 밥을 한 그릇 더 먹는 거야 입고 싶은 옷을 사기 위해 팍팍 돈을 쓰던 내가 아예 옷가게를 피해가고 좋은 것 깨끗한 것만 찾고 더러운 것은 내 일이 아니었는데 그 반대가 되는 거야 아이가 사달라고 하면 줄서는 것도 지키지 않아 예전에 엄마가 그러면 엄마! 핀잔주며 잔소리를 했는데 내가 그렇게 되는 거야 아이가 까무러치게 울면 이해할 수 없어, 아무데서나 가슴을 꺼내 젖을 물리는 거야 뭔가 사라져가고 새로운 게 나를 차지하는 거야 이런 적도 있어, 초록잎이 아이에게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이가 아픈 거야, 그래서 공터에 가서 풀을 베다가 침대 밑에 깔아주기도 했어 엄마도 태어나는 거야 (게시기간 : 2019.02.03. ~ 02.09.) 1135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게시기간 : 2019.01.27. ~ 02.02.) 1134 우리 닮아갈 때 세상은 아름답다 최영복 오늘도 너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거냐 언제부터 너는 내 눈 가까이 다가와 아주 천천히 조금씩 가슴 이곳저곳을 점령하더니 꿈을 꿔도 그 속에서 미소 짓는 너의 모습을 보이게 하더라 너도 이런 마음인 거지 그렇게 하나씩 닮아가는 우리 마음 수많은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거 맞지. (게시기간 : 2019.01.20. ~ 01.26.) 1133 산과 강은 한현정 산을 돌아 흐르는 강과 강에 제 모습을 비추는 산 항상 변함없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오랜 세월 흐르고 또 흘러 왔지만 강은 한 번도 같은 물을 담아 본 적 없었고 늘 말없이 그 강을 지켜봤던 산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새 움을 틔워 왔었지 산과 강은 변함없는 게 아니야 부지런히 제 할 일 다 하고 있었던 거야. (게시기간 : 2019.01.13. ~ 01.19.) 1132 나를 위한 기도 김도화 나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깊이 사랑하게 하소서. 내가 보낸 눈길 하나가 의미가 되기보다는 누군가의 눈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진정으로 미소하게 하소서.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기쁨이 되기보다는 누군가의 슬픔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겸허로 돌아보게 하소서. 내가 걸어간 발자국 하나가 희망이기보다는 누군가의 방황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고요히 바라보게 하소서. 내가 본 그 시선 하나가 높고 푸른 하늘이기보다는 아픈 상처 가득한 내 벗임을 깨닫게 하소서! (게시기간 : 2019.01.06. ~ 01.12.) 1131 솔개 곽문연 낡은 부리가 빠질 때까지 부리로 바위를 쪼개고 있는 솔개를 보았다 솔개는 새로 돋은 부리로 늙은 발톱과 두꺼워진 깃털을 뽑아내고 새 발톱과 깃털을 세운다 생은 때로 제 살을 도려내야 다시 서는 것 아슬한 절벽을 지나 솔개가 산을 덮으며 산맥을 넘는다 (게시기간 : 2018.12.30. ~ 01.05.)


3-23.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9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