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8 년
 

   2018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익스플로러 단축키(Ctrl+F)로 시 제목, 내용, 시인 이름을 검색(?) 할 수 있습니다.  ^^;

1100 과수원 박주택 애인아, 그 뒤 샛길로 걸어 나오면 기억하겠지, 드높게 갠 하늘 아래 온갖 들꽃이 피고 과수원이 언덕에 비스듬히 누워 흰 구름을 읽는 곳. 네가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땐 미루나무아래 냇물의 물풀 사이를 오가는 치어를 따라 박 넝쿨과 호박 넝쿨이 우거진 마을의 집들 사이를 걸어오렴 혹 다 하지 못한 슬픔이 있다면 들판에 서서 이마에 밴 땀을 닦고는 소금쟁이의 노래에 잠시 귀라도 열어두렴... 애인아, 너 있는 자리 향기 가신 그 자리 혹 슬픔은 슬픔대로 부글거릴라치면 평상에 앉아 깍아 먹던 과수원의 사과와 마당에 하늘거리던 봄날의 채송화를 기억하렴 네 뿌리가 되어주던 뒷산의 자작나무 숲에서 네 온다는 기별을 알리면 나 개켜놓은 와이셔츠를 다려 입고 마을 입구 느티나무 지나 들꽃 사이 자전거를 타고 너 맞으러 가리라. (게시기간 : 2018.05.27. ~ 06.02.) 1099 흑백사진 이문조 울퉁불퉁한 시골집 벽에 걸린 낡은 흑백사진 나란히 앉은 젊은 새색시 멋있는 신사 저게 누구인가 아버지 어머니도 저렇게 젊은 시절이 있었나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늙고 꼬부라진 모습뿐인데 세월은 가고 세월 따라 사람은 가고 없어도 흑백사진 속의 그 모습 변함이 없구나 물끄러미 올려다본 순간 다정한 미소로 답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게시기간 : 2018.05.20. ~ 05.26.) 1098 거짓말 김수열 "선생님은 무얼 먹고 그렇게 키가 커요?" 풋과일 같은 여자애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올려다본다 시선은 집중되고 정적이 감돈다 "착한 마음"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이들 벌떼같이 소리지른다 책상 탕탕 내려치는 놈 자다가 벌떡 깨는 놈 힐끗힐끗 눈 흘기는 놈 머리 싸매고 뒤집어지는 놈 우웩우웩 토악질 흉내내는 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놈 교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다 그래, 이놈들아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낸들 왜 모르겠냐만 그래도 우기고 싶구나 너희들 앞에서 만큼은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구나 (게시기간 : 2018.05.13. ~ 05.19.) 1097 어느 어머니의 일기 작가미상 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인데 모진 목숨 병든 몸으로 살아 네게 짐이 되는구나. 여기 사는 것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렇게 일찍 네 애비만 여의지 않았더라도 땅 한평 남겨 줄 형편은 되었을 터인데 못나고 못 배운 주변머리로 짐 같은 가난만 물려주었구나. 내 한입 덜어 네 짐이 가벼울 수 있다면 어지러운 아파트 꼭대기에서 새처럼 갇혀 사느니 친구도 있고 흙도 있는 여기가 그래도 나는 족하다. 내 평생 네 행복 하나만을 바라고 살았거늘 말라비틀어진 젖꼭지 파고들던 손주 녀석 보고픈 것쯤이야 마음 한번 삭혀 참고 말지. 혹여 에미 혼자 버려 두었다고 마음 다치지 마라. 네 녀석 착하디 착한 심사로 에미 걱정에 마음 다칠까 걱정이다. 삼시 세끼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 에미 걱정일랑은 아예 말고 네 몸 건사 잘하거라. 살아 생전에 네가 가난 떨치고 살아 보는 것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 행복하거라, 아들아. 네 곁에 남아서 짐이 되느니 너 하나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라도 나는 족하다. (게시기간 : 2018.05.06. ~ 05.12.) 1096 맹물 장일순 하긴 물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좋은 물은 무미(無味)한 맹물이지요. 아무 맛도 없는 게 맹물이지. 맹물은 날마다 먹어도 괜찮습니다. 꿀물은 달지만 그렇게 마실 수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가끔 먹는 것을 귀하다 하고 매일 먹는 것은 별로 귀한 줄 모르거든요. (게시기간 : 2018.04.29. ~ 05.05.) 1095 아내의 빨래 공식 이기헌 아내의 빨래공식은 늘 일정하다 물높이 중간에 놓고 세탁 십 분 헹굼 세번 탈수 삼 분 후에 다시 헹굼 한번 그러나 간혹 공식이 파기될 때가 있다 남편 잘 둔 친구를 만났다든가 나의 시선이 그녀를 빗나갔다 싶은 날이면 아내의 빨래 법칙엔 밟아 빨기가 하나 추가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실에 앉아 아내가 세탁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잔소리가 어디서부터 터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다가 거실을 정리하거나 하지도 않던 걸레질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온 날에도 아내가 빨래하는 시간만 되면 늘 긴장한다 예정된 공식대로 세탁기가 돌아가면 그제서 오늘의 스포츠 뉴스를 본다 (게시기간 : 2018.04.22. ~ 04.28.) 1094 그냥 가게 윤임수 노인네가 촌에서 구멍가게 하나 차렸는데 당최 이름 짓기가 어렵더라구 그래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뭐라고 지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봤지 근데 누가 뭐 그런 것으로 고민하느냐구 그냥 가게라구 하라구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더라구 뭐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바로 나무 간판 하나 달았지 달고 나서 보니 “그냥가게”도 그냥저냥 좋더라구 쓸데없이 거창하지도 않구 웃기 좋아하는 나처럼 편하기도 하구 그렇더라구 그건 그렇구 기왕 왔으니 뭐라도 사가야지? 왜 그냥 가게? (게시기간 : 2018.04.15. ~ 04.21.) 1093 내가 물이라면 김옥자 내가 물이라면 그대의 마음 골짜기로 흐르는 정화수가 되고 싶습니다 흐르고 흐르다 설혹 수많은 돌부리와 부딪히어 아픈 기억을 남기는 길이라 해도 기쁨과 슬픔이 고여 있는 그대 마음 깊은 곳으로 향하는 물이고 싶습니다 살다가 세월의 뒤안길에서 그대, 힘겨울 때 나, 그대 마음 숲에서 맑은 호수로 고여 당신 쉬어가는 안식처이고 싶습니다 (게시기간 : 2018.04.08. ~ 04.14.) 1092 봄 편지 황영순 나는 꽃씨입니다 아름다운 호미질을 기다려 온 흙 속의 꽃씨입니다 추운 들녁에서 얼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진 결심으로 혈서를 쓰면서 긴 눈물로 왔읍니다 슬픈 내 피 늦게야 이곳 이곳으로 와서 저녁마다 금빛 도리깨로 곤한 잠 깨우고 어두움을 털어내고 있읍니다 오늘은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누군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기침으로 올 것 같은 향그러운 새날입니다 꿈길로 바람소리 파도소리 밀려 오는 풍란처럼 풍란처럼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나는 꽃씨입니다 (게시기간 : 2018.04.01. ~ 04.07.) 1091 목련화 최창섭 목련나무 아래 딸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목련꽃을 한 송이 따 달라던 딸아이가 막 떨어진 목련 한 송이를 주워서 "아, 향기가 참 좋다"며 국물을 마시듯 코를 들이대고 있다가 "아빠도 한 번 맡아 봐" 하고 내민다 나는 손톱깎이 같은 바람이 뚝뚝 끊어먹은 우리들의 꿈같은 하얀 그 꽃잎을 받아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는다 쉽게 꺾이지만 다시 피어나는 희망처럼 (게시기간 : 2018.03.25. ~ 03.31.) 1090 이발사의 봄 장서언 봄의 요정들이 단발하러 옵니다. 자주공단 옷을 입은 고양이는 졸고 있는데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프리즘의 채색은 면사인 양 덮어 줍니다. 늙은 난로는 가맣게 묵은 담뱃불을 빨며 힘없이 쓰러졌읍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는 용궁으로 고향으로 꿈을 따르고 젊은 이발사는 벌판에 서서 구름 같은 풀을 가위질할 때 소리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 벽화 속에 졸고 있는 종달이여. (게시기간 : 2018.03.18. ~ 03.24.) 1089 다만 다를 뿐이다 강희창 세상에 아닌 것은 없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다만 다를 뿐이다 내 맘에 들지는 않지만 너의 생각도 나름의 뿌리와 색깔을 가졌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부정하며 살았다 우리는 하나만을 고집했으며 일등만 사는 줄 알았다 편을 가르고 따로따로 살아 왔잖은가 기러기떼가 먼 길을 갈 때에 제 각각 순번을 내어 끼륵끼륵 어기여차 앞에서 안내하는 선두에게 울음짓, 날갯짓을 보내며 간단다 우리는 한 시대를 날아가는 기러기떼 혼자서는 못 가는 것, 다 같이 가는 세상 세상은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며 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짓이어야 한다 세상을 처음 배우는 아기에게 도리도리 대신에 끄덕끄덕을 가르치자 잼잼 대신에 짝짜꿍을 가르치자 세상에 아닌 것은 없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다만 다를 뿐이다 (게시기간 : 2018.03.11. ~ 03.17.) 1088 아내의 봄비 김해화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 갔는데 파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 생선 오천원 조갯살 오천원 도사리 배추 천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 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게시기간 : 2018.03.04. ~ 03.10.) 1087 살다 보면 김남권 살다 보면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진다 살다 보면 꽃피는 날 있을 거야 바람이 불어와 온통 가슴을 흔들어 놓고 갈 때도 있겠지만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가 되어 있을 거야 강물이 소리 없이 흘러 바다로 가는 동안 네 가슴의 슬픔을 안아 줄 거야 살다 보면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진다 살다 보면 별빛이 날 있을 거야 어둠이 밀려와 온통 눈 앞을 가려 놓고 갈 때도 있겠지만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향기를 드리우는 꽃밭이 되어 있을 거야 강물이 소리 없이 흘러 바다로 가는 동안 네 가슴의 상처를 안아 줄 거야 살다 보면 그냥 살다 보면 눈 녹듯이 그냥 살아질 날 있을 거야 바람이 불어도 꽃잎이 지지 않고 어둠이 몰려와도 가로등 불빛 환한 그런 날 있을 거야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너의 등대가 되는 그런 날 있을 거야 (게시기간 : 2018.02.25. ~ 03.03.) 1086 촛불 손선희 누구나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그 무엇이 필요하다 사랑의 아픔과 그리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이는 행복하다 나의 마음은 그대 향한 사랑으로 온통 채워졌고 촛불이 제 몸을 녹여 어둠을 밝히듯 나의 몸과 마음을 태워 그대의 아픔에 희망의 불씨를 심어 주고 싶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를 위해 그대의 빈 가슴에 꺼지지 않는 촛불로 남고 싶다 (게시기간 : 2018.02.18. ~ 02.24.) 1085 설날의 설레임 신경희 밤이 깊도록 한입 가득 만두 속을 채우며 만두를 빚으시던 이른 새벽부터 마음은 벌써 동구 밖에 나와 서 계실 어머니 주름진 얼굴 위에 엷은 미소 설레이는 마음 기다림이 익숙한 날 속에 설날만큼은 기다림이 즐거워라. 묵묵히 마당 한가운데를 싸리비질 하시며 헛기침 하시는 벌써부터 마음은 동구 밖으로 달리고 계실 아버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자식들 그저, 무언의 바램은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기를 기원하는 마음 까치가 울어대는 아침이면 행여 출가한 자식에게 소식이 있을까 사랑 긴 마음 동구 밖을 달린다. 얼굴만 보아도 행복한 나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설날의 설레임 (게시기간 : 2018.02.11. ~ 02.17.) 1084 입춘 유승희 봄 앞에서 선 날 좋은 날만 있어라 행복한 날만 있어라 건강한 날만 있어라 딱히, 꼭은 아니더라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크게 욕심 부리지 않을지니 새 봄에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들로 시작되는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매서운 추위 걷히고 밝은 햇살 가득 드리운 따스함으로 뾰족이 얼굴 내미는 새순처럼 삶의 희망이 꿈틀거리는 그런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게시기간 : 2018.02.04. ~ 02.10.) 1083 한번 더 이승헌 길의 끝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때, 한 걸음 더 내디뎌라.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될 때 한 번 더 시도하라. 그 한 걸음이 새로운 길을 만들고 그 한 번의 시도가 최고를 만든다. 한 번 더 관심을 갖고 확인하고 한 걸음 먼저 다가서고 한 번 더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한 번 더 시도해 보려는 그 의지와 마음. 그 한 번이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게시기간 : 2018.01.28. ~ 02.03.) 1082 좋은 사람 구별법 진순희 프랑스 니스의 카페 '라 프티트시라'의 커피 값이 요상하다 맛은 같아도 값은 다르다 "커피 한 잔"은 7유로 "커피 한 잔 주세요"는 4.2유로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세요"는 1.4유로 무례할수록 비싸지는 커피의 값 내게 좋은 사람이라도 웨이터나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웨이터 룰' 종업원에게 왕처럼 굴며 함부로 대하는 거친 말에는 반드시 과태료가 붙는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값이다 (게시기간 : 2018.01.21. ~ 01.27.) 1081 깃들고 싶다 김선주 겨울 해거름에 참새 떼 깃들이는 사철나무 울타리는 따스하다 식어버린 방고래에 뚝뚝 생솔가지 꺾어 군불 지피는 새벽녘 구들을 타고 늑골 사이로 올라오는 엄마의 손은 따스하다 인생이 힘들고 외롭다고 느껴질 때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어 울고 싶어질 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내가 가난하고 외로울 때 당신에게 깃들고 싶다 (게시기간 : 2018.01.14. ~ 01.20.) 1080 나이테 신영길 나는 어느 숲을 거닐고 있다. 아름드리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 한 나무 앞에 섰다. 아는가. 추운 겨울철을 겪은 나무라야 나이테를 지니게 되지. 따뜻한 곳에서 일 년 내내 성장만하는 나무에게는 나이테가 없다는 것을, 아름다운 삶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옹이를 본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토록 찬란한 색을 빚어냈을까. 아픈 만큼 단단해지는 옹이는 다른 부분이 다 썩어도 끄떡 않고 천년을 간다. 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태어나게 된다. (게시기간 : 2018.01.07. ~ 01.13.) 1079 산정묘지 (山頂墓地)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 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게시기간 : 2017.12.31. ~ 2018.01.06.)


3-22.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8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