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7 년
 

   2017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익스플로러 단축키(Ctrl+F)로 시 제목, 내용, 시인 이름을 검색(?) 할 수 있습니다.  ^^;

1079 산정묘지 (山頂墓地)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 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게시기간 : 2017.12.31. ~ 2018.01.06.) 1078 삶을 이야기하며 서태우 우리는 가끔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걸어온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 행여 삶에 허덕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가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췌해진 가슴이 얼마나 메말랐으며 곤고한 영혼이 갈급함에 떨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며 그러한 나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게시기간 : 2017.12.24. ~ 12.30.) 1077 따뜻한 슬픔 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게시기간 : 2017.12.17. ~ 12.23.) 1076 기억은 끈끈이 주걱 한명희 기억은 단단하다 손발을 옹송거린 호두껍질처럼 쉽게 무르지 않는다 끊어 내려고 해도 이빨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억은 싱싱하다 물을 뿌리면 되살아나는 배춧잎처럼 기억은 싱싱하다 뒤적여도 뒤적여도 숨이 죽지 않았다 기억은 튼튼하다 튼튼한 신발을 신고 뒤따라왔다 잠자리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았다 기억은 끈끈이 주걱 머리 속에 벌레가 바글거려도 끈끈한 주걱을 놓치지 않는 기억 그것은 끈끈이 주걱 (게시기간 : 2017.12.10. ~ 12.16.) 1075 철새는 날아가고 신경득 나는 망치보다는 못이 되고 싶어 맞으면 맞을수록 깊게 깊게 박혀 어둠 속에 숨어서 짧게 또는 길게 받쳐 주는 힘이 한 개 못이 되어 더러는 걸려 주는 힘이거나 버티어 주는 힘이 되고 싶어 (게시기간 : 2017.12.03. ~ 12.09.) 1074 나이테 노태웅 우리도 나무처럼 볼 수 없는 곳에 둥근 원을 긋고 살았겠지 가슴 깊은 곳에 희망의 금을 긋고 사랑의 금도 긋고 곰삭은 아픔도 새기며 살았겠지 오늘 짚고 넘어온 세월의 둥근 금을 세다가 나이 탓만 하고 있다오 얼굴은 보이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이름은 떠오르는데 얼굴이 흐려지고 아마도 나이테에 건망증의 금이 더해가네 보네 아니면 새겨 놓은 금 하나 지워지고 있나봐 (게시기간 : 2017.11.26. ~ 12.02.) 1073 끝방 강미정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 불꺼진 방 모서리를 지나 어두운 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다시 수많은 어두운 방을 돌고 돌아가 끝방,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어둠을 담았던 쓰레기통을 씻어 말리고 어두운 방을 닦은 걸레가 겹쳐져 널려 있는 그 옆, 고독하고 긴 복도를 닦은 막대걸레가 세워져 조용히 말라가는 그런 방, 난 그 방 앞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간 가만히 내려 무슨 소린가 끊임없이 들리다가도 귀를 갖다대면 고요해지지 문을 열면 환하게 텅빈 방이 되어버리지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 여러 개의 어둔 방 모서리를 돌고 돌아가 맨 끝에야 다다르는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수많은 빈 방 지키며 부르는 노래 간혹간혹 들리는 그 끝방, 가장 많이 아픈 아픔이 가장 많이 기다린 기다림이 산다는 방, 그 방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너무 화안해서 눈을 감고 말아, 눈을 감고 말아 (게시기간 : 2017.11.19. ~ 11.25.) 1072 11월의 나무 김경숙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게시기간 : 2017.11.12. ~ 11.18.) 1071 인생을 묻는 그대에게 서지월 부는 바람 탓하지 마라 예비된 몸짓인 것을 지는 꽃 한탄하지 마라 작별의 시간인 것을 앞서 가는 자 부러워 마라 먼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높은 나무의 열매 부러워 마라 부귀영화가 매달려 있음이 아닌 것을 (게시기간 : 2017.11.05. ~ 11.11.) 1070 사람답게 산다는 일 나명욱 사람답게 산다는 일은 제 할 도리 제대로 다하는 일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일은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도 줍고 뒹구는 쓰레기도 치우는 일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 즐겁게 해줄 줄 알고 산다는 기쁨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일은 아침이면 햇살 바라보며 미소지을 줄 알고 밤이면 밝은 달빛 속에 콧노래 부를 줄 아는 일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일은 내가 선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지 고민하고 납득하면서 실행할 줄 아는 일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일은 한 평생을 연구하고 노력해도 끝끝내 다 걷지 못할 먼 길이다 (게시기간 : 2017.10.29. ~ 11.04.) 1069 단풍 조태일 단풍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제 몸처럼 뜨거운 노을을 가리키고 있네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묻는 나에게 단풍들은 대답하네 이런 것이 삶이라고 그냥 이렇게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고 (게시기간 : 2017.10.22. ~ 10.28.) 1068 반복 신평 이제 막 날갯짓 하려는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법을 가르쳐 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 같은 방법 아버지와 달리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다 구부려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깨 너머 그가 겪어나갈 신산(辛酸)의 세월이 겹겹이 둘러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세상은 차갑고 무섭단다 내 힘 한 점 소용없을 때까지 네 기력을 돋울 군불이 되고 싶건만 이미 달빛이 된 아버지 나도 곧 달빛으로 오른다 아들은 그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 가르치며 그 옛날 자신의 숨결과 닿았던 내 숨결을 기억하리 생의 반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다 (게시기간 : 2017.10.15. ~ 10.21.) 1067 바람을 타야 아름답다 금이정 나무는 바람을 타야 아름답다 이파리 하나 까딱 않고 서 있는 나무를 보면 징그럽다 박제된 짐승 같다 바람이 불면 나무는 그제서야 율동한다 이리저리 들까불고 웅웅대는 잎들은 싱싱하다 바람을 타는 나무는 진정 살아있다 사람도 바람을 타야 아름답다 넓고 깊은 감정의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야 훈훈하다 표정 없는 사람을 보면 틀 속에 갇힌 사진 같다 오관에 와 닿는 바람 막지 않고 순순히 맞이하는 사람은 싱싱하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그 고저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게시기간 : 2017.10.08. ~ 10.14.) 1066 주름 박규리 제 얼굴 제가 만든다는 말 무엇인가 했는데 지울 수 없는 사연 건너뛰지 못한 세월 골골히 주름으로 잡혀 내 얼굴이 되었다 웃음 하나에 주름 하나 서러움 하나에 주름 하나 이렇듯 살가운 사정과 스산한 과거 내게도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몸 버리고 떠돌던 흔적과 양미간 깊이 팬 상처 그러나 생각하면 내 주름은 또다른 누구의 주름이 아니었으리 나 때문에 눈물 흘리던 사람이여 나 때문에 섧게 섧게 속 태우던 사람이여 내 철없는 욕심과 부질없는 사랑이 상처 한줄 그을 줄 차마 어찌 알았으랴 언제부터였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란 주름과 주름이 섞이는 일이라는 걸 짐작한 뒤부터 내가 먼저 한줄 주름으로 눕게 될까봐 그대에게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깊은 주름으로 쓸쓸히 접히게 될까봐 그대에게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깊은 주름으로 쓸쓸히 접히게 될까봐 짐짓 딴 전이나 피우다 먼데로 말꼬리 흘린 적 참 많았다 (게시기간 : 2017.10.01. ~ 10.07.) 1065 부침개 한 판 뒤집듯 최성아 두둥실 프라이팬에 한가위 달이 뜬다 갖가지 잘 버무려 둥그렇게 다듬어진 어울려 살아가는 자리 이랬으면 좋겠다 지글지글 바닥 열기 골고루 나눠 보면 버티던 생것 날것 기세가 기울면서 앉았던 서로의 모습 점점 더 닮아간다 너와 나 선을 긋는 차이와 대립까지 부침개 한 판 뒤집듯 그랬으면 좋겠다 뒤집혀 어우러진다 한가위가 익어간다 (게시기간 : 2017. 9.24. ~ 9.30.) 1064 좋겠다 안상길 날마다 아침을 살 수 있다면 찬이슬 바지자락 흠뻑 적시며 풀 냄새 푸르른 논두렁길을 거미줄에 채이며 달려간다면 솔바람 솔솔 부는 솔숲 길 걸으면 바람소리 산새소리 들려 온다면 새벽같이 배추밭 돌보러 가신 흙을 사랑하신 아버지 모시고 와 따스한 아침상에 마주 한다면 딸그락딸그락 어머니 숭늉이 구수하다면 떨렁떨렁 외양간 소 방울소리 들려 온다면 그 때 미닫이 노란 문종이 환한 햇살이 스며든다면 지나간 어린 날을 다시 산다면 (게시기간 : 2017. 9.17. ~ 9.23.) 1063 의자 김종문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풍이나 로마네스크풍과는 거리가 멀고 더우기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 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는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판,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8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 나의 만세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중이라도 비어 있지 않다. (게시기간 : 2017. 9.10. ~ 9.16.) 1062 을지로 순환선 권정현 옛사랑을 닮은 여자를 바라보다가 을지로입구역을 그냥 지나쳤다 내리지 못하고 오후 세시의 전동차 안은 한숨과 하품의 교대로 입을 벌리고 있다.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았거나 기대어선 자세로 내려야할 역을 생각하고, 더러 덜 익은 그들의 꿈을 헤아린다, 너무 오래 흔들리고 살아왔던 거다 유리창에 비친 어제이거나 혹은 내일일 표정과 표정이 겹쳤다가 쉬이 흩어진다 힘겨움에 살짝 데쳐진 얼굴들에선 생선을 끌어올리던 그물냄새가 나기도 하고 노을 밭에 앉아 콩대로 삶을 조율하던 고향의 기억 설핏 묻어있기도 하다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백일홍꽃씨 툭툭 벌어지듯 잠시 눈 맞춘 표정들이 바람에 실려 나간다 사랑했던 세월이 한 시절이듯, 다시 전동차는 달리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순환선 전동차 옛사랑을 닮은 여자를 바라보다가 신도림역까지 오고 말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하오. (게시기간 : 2017. 9.03. ~ 9.09.) 1061 집착 최승헌 난 중에서 풍란이 향기가 제일 좋다하기에 얼마 전 이 난을 사다 방 한구석에 갖다 놓았다 날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청자빛 화분에 그 작은 몸을 감춘 채 모가지만 내밀고 있는 난을 마치 어미가 젖먹이 아기를 바라보듯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곤 했다 난이 이런 간절한 심정을 읽었는지 어느 날 작고 연약한 하얀 꽃이 피었다 그런데 내 바람을 못 이겨 꽃이 억지로 나와서인지 아무리 코를 갖다 대도 도통 향기가 나질 않았다 내가 하도 애타게 꽃을 기다리니까 채 여물지도 않은 꽃망울을 잠시 보여주었던 것이었다 내 상처도 그랬다 온전히 치유하지 않고 긴긴 날 그 상처에만 집착하니 상처는 발효될 틈도 없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발효되지 않는 덜 여문 인생을 뼛골 빠지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게시기간 : 2017. 8.27. ~ 9.02.) 1060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내 기억은 다시 유년 시절로 돌아간다. 이제 와 깨달았으되, 그때의 부엌은 부재했던 내 어머니의 자궁을 대신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 어둑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고요히 불을 지켜보면서 꿈을 꾸고 먹이를 받아먹으며 몸을 불려가던 커다란 태아였다. 이후 그 아이는 아홉 살로 다시 태어나 제 어미의 부엌에서 어미의 슬픔을 먹고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50을 넘긴 지금에도 여태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늙은 어미가 그립거나 삶에 지쳐갈 때면 슬그머니 칼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썰거나, 끓이거나 지지고 볶으며 여전히 삶에 대한 낯선 희망과 덧없는 기대를 품곤 한다. 이렇듯 사는 일과 밥을 짓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서로 완전히 일치한다. 실제로 나는 비좁은 주방 옆에 놓인 식탁에서 글을 쓸 때가 가장 마음이 평온하고 어쩐지 행복해지기도 한다. 대장장이에게는 아무래도 대장간이 마음 편한 공간이듯이 말이다. (게시기간 : 2017. 8.20. ~ 8.26.) 1059 바닷가의 낡은 악기 한기팔 이 바다 어디선가 손풍금 소리가 난다 악사는 없고 악보만 있는 . 어쩌자고 바다는 이토록 그리움만 키우는 것이냐. 저것봐 저것봐 바다의 건반을 지긋이 누르며 난타하는 손과 손 수천 수만의 소리란 소리 모두 밀려와 한 꺼번에 무너지는 높은 음자리 켜면 켤 수록 더 많은 파도가 파도를 타고 솟아오르는 바다의 낡은 악기 바다가 내는 소리에는 그 아득한 곳의 물소리 노을 빛 붉은 옛 고향의 마을 풍금소리가 난다. (게시기간 : 2017. 8.13. ~ 8.19.) 1058 혼자 있어 봐 이화주 친구와 쌍동밤처럼 어깨동무하는 것도 좋지만 참새떼처럼 짹째글짹째글 몰려다니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아주가끔씩은 혼자 있어 봐 별들의 이야기 엿들을 수도 있고 입속말 하던 시계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온단다. 그래, 운동장 가슴이 쿵쿵 울리도록 뛰놀던 아이들이 가 버린 늦은 저녁 그네에 혼자 앉아 바람처럼 휘파람을 불어봐 거인같은 운동장이 이웃집 아저씨처럼 너를 번쩍 안아올려 네 마음의 무게를 재어 주실 테니까. (게시기간 : 2017. 8.06. ~ 8.12.) 1057 나에게로만 오는 햇빛 서봉석 저렇게 많은 햇살 부셔짐 속에도 유독 나에게만 오는 햇빛 있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서도 나만 보라고 반짝거리는 눈짓이 있다 저렇게도 많이 부는 바람 속에도 나만을 향해 오는 설레임이 있다 저렇게도 크게 화 한 고요 속에 유난히 나를 에우는 침묵이 있다 저렇게 많이 핀 꽃들 중에도 내가 춤을 추어야 향기가 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세상과 나의 인연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간섭으로 생겨나고 허물어 지고한다 어디 내가 그냥 내 한 몸이랴 저렇게 많은 파도 중에도 나만을 향해 밀리는 출렁거림이 있으니 세상이 넓은 것은 그냥 허한 공간이 아니라 달려도 끝없이 달려야 한다는 삶의 넓이다 사랑만으로 그려 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넓고 사랑만으로 채워 보기에 너무도 좁은 공간 (게시기간 : 2017. 7.30. ~ 8.05.) 1056 눈물과 웃음 사이 차영섭 어린아이는 끄덕하면 잘 웃고 끄덕하면 잘 운다 눈물과 웃음은 멀고도 가까운 사이 신이 준 고귀한 선물이다 눈물이 넘칠수록 기쁨이 피어나고 웃음이 넘칠수록 슬픔이 흘러 내린다 눈물 속에 웃음이 섞여 나오고 웃음 속에 눈물이 섞여 나온다 벽시계 추처럼 울고 나면 웃을 일이 웃고 나면 울 일이 생긴다 눈물과 웃음은 사랑 속에선 함께 살고 우울을 없애주는 가장 좋은 약이다 눈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고 웃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바람이다 눈물과 웃음이 많은 사람은 맑은 물과 바람이 많은 산과 같다. (게시기간 : 2017. 7.23. ~ 7.29.) 1055 나팔꽃 이윤학 나팔꽃은 시름시름 앓다가도 동이 트면 훌훌 털어버린다 후회란 원래 그런 졸속이다 괜히 피었다 싶다가도 피기 전으로 돌아가려 하다가도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 싶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나팔꽃은 뻥 뚫린 목구멍으로 자기 몫인 햇살을 받아 삼킨다 (게시기간 : 2017. 7.16. ~ 7.22.) 1054 그대, 내 마음을 받았는지 전숙 비 내리는 우울한 화요일 쯤 무작정 내 마음 기다려보았는지 불현듯 배달되는 꽃다발처럼 내 마음 다가갈 때 점자처럼 꼭꼭 박힌 그리움 손끝에 더듬으며 봉숭아 꽃물처럼 발갛게 두근거렸는지 보내는 순간의 떨림이 받아보는 순간으로 흘림 없이 건너가서 마음 깊은 풍경소리처럼 기다림의 적막을 따뜻하게 울렸는지 내 마음 미처 보내지 못했던 적막강산 그 답답한 묵음들의 말문이 터져 세상의 바람들이 문득 그대에게 종알종알 말을 걸기 시작했는지 그리하여 그대가 갓 날기 시작한 어린 새처럼 잠시라도 행복했는지 (게시기간 : 2017. 7.09. ~ 7.15.) 1053 나를 다리다 김필영 아내가 다림질하는 아침, 잠꾸러기가 되어본다 북북, 분무기 소리게 실눈을 뜬다 다리미는 나의 등을 여러 번 지나간다 부도를 맞고 처음 마련한 집에서 쫓겨가던 날 아내는 저렇게 내등을 어루만지며 울었었다 뒤틀리고 주름진 팔로 수없이 다리미가 지나간다 놓칠 뻔했던 야윈 팔을 붙들고 여기까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석회질로 굳어가는 뼈마디를 정성스럽게 편 아내는 옷을 훌훌 털어 돌리더니 이번엔 가슴에다 물을 뿜는다 웅크렸던 그늘 속이 더욱 서늘해진다 지나가는 아내의 손길마다 금세 훈훈해진다 기죽지 말라는 것일까 다리미 잡은 아내의 손목을 슬며시 쥐어본다 화들짝 놀라며 어머나! 이이 좀 봐, 주무시다 말고 왜 우시는 거에요? 숨죽이던 다리미가 뜨거운 입김을 토해낸다 (게시기간 : 2017. 7.02. ~ 7.08.) 1052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게시기간 : 2017. 6.25. ~ 7.01.) 1051 나비 전경린 스무살 땐 누구나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식대로 살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검은색 트렁크를 들고 아주 멀리 떠나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서른 살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먼 곳에서도 같은 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 대해서 과대망상은 없다. 세상은 자기를 걸어 볼만큼 가치 있지도 않다. 세상은 외투처럼 벗고 입는 것, 벗어 버릴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누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인가. 서른 살에는 다만, 자신이 아직 자신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게시기간 : 2017. 6.18. ~ 6.24.) 1050 음악 김현옥 어떤 음악은 내 속에 들어와 떠날 줄 모르고 어떤 음악은 내 밖에서 머뭇대고 어떤 음악은 아예 내 곁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음악은 애인처럼 잠드는 순간까지 듣고 어떤 음악은 잊혀졌다 문득 생각나면 듣고 어떤 음악은 우연히 거리에서 스치듯 듣고 잊어버린다 어떤 음악은 기억의 물감을 풀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음악은 마음의 빛바랜 사진들을 들춰보게 하고 어떤 음악은 가슴의 수화기를 내리게 한다 어떤 음악은 마음으로 듣고 어떤 음악은 온몸으로 듣고 어떤 음악은 귀로만 듣는다 어떤 음악은 햇빛이고 어떤 음악은 소낙비고 어떤 음악은 바람이다 어떤 음악은 내 속으로 흘러와 그리운 길이 되고 꿈꾸는 산이 되고 건널 수 없는 강이 된다 어떤 음악은 내 밖으로 흘러가 기도하는 나무가 되고 침묵하는 섬이 되고 떠도는 구름이 된다 어느 순간, 내가 음악이 되는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대에게 나를 들려주고 싶어진다 (게시기간 : 2017. 6.11. ~ 6.17.) 1049 바람직한 실수 김태인 처마 및 공터에 씨앗 심었지 솎아낼 요량으로 두 개씩 심었어 비 그친 다음날 가봤지 씨앗 심은 자리를 낙숫물이 파헤쳐 놨더군 꽃삽 떨어트리고 말았어 다시 심을 생각으로 삼일 뒤 다시 갔지 의심스러운 눈을 비비고 또 비볐어 아내 엉덩짝 같은 둔덕 양쪽에 돋아난 싹들이 가녀린 떡잎으로 돌 지난 아가처럼 하트를 그리며 이름 모를 싹들과 웅얼웅얼 옹알이하고 있지 않겠어 창고에 꽃삽 던져 넣고 자물쇠를 채웠어 꾸미고 싶던 화단이었냐 내게 묻지 마 언제 꽃삽 꺼내게 될지 나도 모르니까 너는 알고 있니? 넌 잡초이고 너는 꽃이다 누가 구분 지었는지 내가 잡초인지 꽃인지 (게시기간 : 2017. 6.04. ~ 6.10.) 1048 절벽 이만섭 세상에는 많은 절벽이 있지만 부딪히기 위해 태어나는 절벽이 있다 더 충실하게 더 집요하게 부딪혀서 도달하는 경계가 있다 부딪히는 것은 받아주기 위한 절벽이 있듯이 그런 절벽은 온몸이 모서리다 그런 절벽은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그런 절벽은 온몸이 해답이다 흰 거품으로 부서진 파도가 이를 악물고 단단한 물로 돌아가듯이 그곳이 푸른 바다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소나무 한 그루가 절벽을 움켜쥐고 있다 이런 위태로운 生이 있다는 듯 처음에는 온몸으로 붙들었으리라, 나무는 가파른 난간에서 낙락장송처럼 외곬으로 푸르러 있다 수직으로 꽂힌 책표지 같은 경사면을 거미손으로 오르내리는 절벽의 내력을 읽는다 파도와 소나무의 존재 방식을 생각한다 (게시기간 : 2017. 5.28. ~ 6.03.) 1047 부부 황성희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웬수’ 어머니의 눈망울 속 가랑잎이 떨어져 내린다 충돌과 충돌의 포연 속에서 본능과 본능의 골짜구니 사이에서 힘겹게 꾸려온 나날의 시간들이 36.5℃ 말의 체온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 (게시기간 : 2017. 5.21. ~ 5.27.) 1046 사랑법 유종순 혁명적일 것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셈법을 버리고 주판알 전자계산기 조작 가능한 컴퓨터의 셈법은 더더욱 버릴 것 사랑은 아홉살 아가의 마음으로 백두산 호랑이의 투쟁적 눈빛으로 때로는 비수가 되어 서로의 병든 가슴을 도려내면서 때로는 오뉴월 버드나무와 봄바람처럼 서로를 보듬으면서 그렇게 아프지만 기꺼이 서로를 주고 받을 것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작지만 성스러운 혁명을 이루는 것 (게시기간 : 2017. 5.14. ~ 5.20.) 1045 사소한, 뒤끝이 남는 홍사성 군대에서 첫 휴가 나온 날이었다 친구들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모두 나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출장에서 닷새 만에 돌아온 날이었다 아이들이 들어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인사하러 오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끝내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보험사에서는 축하 문자를 보내왔다 식구들은 저녁쯤에 모이려니 했는데 그날따라 혼자 라면을 끓여야 했다 귀빠진 지 쉰 몇 번째 되는 날이었다 눈을 뜨자 사방이 낯선 풍경이었다 벌판에 버려진 시체처럼 누워 있자니 세상은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후 마취에서 깨어난 날이었다 (게시기간 : 2017. 5.07. ~ 5.13.) 1044 가구를 바꾸며 한우진 가구를 버리려고 수북한 먼지덩이를 턴다 처음에 새것이었을 때, 아내와 번갈아 쳐다보며 예쁘다, 좋구나 하며 말 걸고 쓰다듬었는데 가구도 늙어 상대하지 않으니 먼지만 모아 쓸쓸함을 견뎠구나 처진 가슴 휘어진 다리 외면당한 분풀이로 때만 찌웠구나 아내하고 간지러운 귓속말 더듬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일상에 두텁게 때 낀 지 오래다 아내는 추억의 연애봉지에 든 세제로 권태를 닦는 모양인데 빛나지 않는 삶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다 새 가구가 놓인다. 반듯하게 놓인다 나무 냄새와 시너 냄새 섞여 방안을 덥힌다 새것은 무슨 티를 내도 꼭 내요, 더 닦을 것도 없는데 아내는 자꾸 걸레질을 하면서 어지간히 다 새것인데 사람만 헌것이네요...한다. (게시기간 : 2017. 4.30. ~ 5.06.) 1043 그래도 좋은 인연 박찬익 꽃은 언젠가 꼭 지긴 하되 은은하거나 찬란하거나 제 성품대로 향기 피우다가 한번쯤 마음 흔들어 놓고 진다 해는 뜨거나 지거나 늘 그런 해라도 하루에 한번은 붉은 빛 길게 늘이며 뒤에 남는 모든 것을 위해 간절하고 찬란하게 축원하다가 한번쯤 마음 흔들어 놓고 기운다 꽃 지고 해 지되 그렇게 지고 기울 듯 나도 한번쯤 그대 위한 한줄의 글 떨리는 마음 아름다운 영혼 고르고 골라 아낌없이 내보이다가 한번쯤 그대 마음 흔들어 놓고 떠나고 싶다. 삶에, 미련에, 떠나는 모든 것에 대해 연연하지 않으며 가다가도 그대와 함께 가슴 저리게 흔들리며 지고 싶다 (게시기간 : 2017. 4.23. ~ 4.29.) 1042 넘어지는 법 김복연 넘어지는 것도 기술이라는 것 처음 두 발 자전거 배울 때 알았다 참 많이도 넘어져서 무릎이나 팔꿈치 멍들고 쓰린 것보다 우쭐우쭐 따라오는 하늘이나 곧 덮칠 듯 빙빙 도는 운동장 나무들이 나에겐 더 큰 상처였다 채 몇 번 페달을 밟기도 전에 벽이나 봇도랑 같은 것이 왈칵 덮쳐와 그만 파경인 하늘 몸의 기억은 정확한 것이어서 오래도록 그 순간을 지니고 다녔는데 사실 그때 바라본 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푸르고 아름다웠다 (게시기간 : 2017. 4.16. ~ 4.22.) 1041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딘 줄 아세요 거기는 가슴에서 머리까지랍니다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는데 평생을 걸리는 사람도 있고 머리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손으로 재보면 두 뼘밖에 안되는데 평생을 걸려서야 가 볼 수 있는 그렇게 먼 거리랍니다 가슴은 뜨겁고 가슴은 너그럽고 가슴은 사랑하는데 머리는 냉정하고 머리는 이기적이고 머리는 계산을 한답니다 두 뼘도 안되는 짧은 거리의 가슴과 머리 어쩌면 나도 지금 도달하지 못하고 가고 있는 중인지도요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장 먼 거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게시기간 : 2017. 4.09. ~ 4.15.) 1040 멀리서 바라보기 강사랑 멀리 산 아래 조그만 분지에 물안개 담겨 꿈결처럼 찰랑거리고 있다 저 안에 신선처럼 사는 사람이 부러워 끙끙 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이 광경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은 조금 떨어진 이 곳 이라는 것을 그저 평범한 내 주변의 것들도 멀리서 바라보면 눈물 날 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게시기간 : 2017. 4.02. ~ 4.08.) 1039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돌은 매끈하고 어느 돌은 편편하다. 굴러 내린 돌, 금이 간 돌, 자갈이 되고 만 돌도 있다. 아래쪽의 넓적하고 큰 돌은 오래된 것들이고 그것들이 없었다면 위쪽의 벽돌들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 성벽은 도대체 누가 쌓은 것일까. 순간이여, 알아서 쌓여라. 누구든 나를 대신해서 순간을 쌓아다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른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 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게시기간 : 2017. 3.26. ~ 4.01.) 1038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며 종달이는 울타리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다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멀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몸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게시기간 : 2017. 3.19. ~ 3.25.) 1037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고미경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 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게시기간 : 2017. 3.12. ~ 3.18.) 1036 짝사랑 양해선 너는 있고 나는 없는 것 너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나는 키를 낮추며 녹아 내리는 것 숱한 그리움만 간직한 채 한없이 너울거릴 뿐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것 (게시기간 : 2017. 3.05. ~ 3.11.) 1035 위로가 필요한 사람 김홍식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아들은 늘 아버지에게 위로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들이 가진 문제는 이미 아버지가 다 겪은 일이지만 아버지의 문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딸에게 어머니의 위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딸은 어머니의 위로를 받으며 성숙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위로하며 두 배로 늙어갑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도 욕하지 마세요 욕먹을 짓을 했더라도 욕먹는 것보다 위로받고 싶어합니다 삿대질하던 손을 거두고 원망하는 말을 돌이켜 앞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세요 실수한 그 순간에 속상해서 가슴 아픈 그 순간에 그가 받고 싶은 것은 위로입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람은 머리끝만큼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게시기간 : 2017. 2.26. ~ 3.04.) 1034 밑줄 서효찬 내 생애 어느 곳에 밑줄 하나 그어볼까 더듬어 본다 옛집으로 거슬러 올라 부엌과 젖은 연기가 맵던 아궁이의 외양간을 떠올린다 음매하고 길게 세월을 붙잡던 송아지를 생각한다 뒤란으로 돌아가 앵두나무 가지를 잡아당긴다 숨어있던 참새들이 우루루 쏟아져내린다 여기는 밑줄을 그을 대목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앞개울로 나가는 길섶에서 민들레를 눈으로만 어루만진다 촉촉하다 아침부터 짓밟힌 질경이의 항의를 못들은 체 모른 체하며 시선은 하얀 뭉게구름에 폭 파묻힌다 포근하다 폭신하다 어머니 품속에서 꿈을 꾸는 듯 행복한 그 순간 이 대목에 밑줄 하나 그어볼까 생각하다가 금년 아흔넷인 어머니의 굽은 등에 시선이 잠긴다 한 평생 희생으로 사신 어머니 어머니 등에 밑줄 하나 그어 쫙 펴드리고 싶다 (게시기간 : 2017. 2.19. ~ 2.25.) 1033 스승 김노을 우리는 꿈과 슬픔이라고 하는 두 스승을 모시고 살아간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전진하도록 힘을 북돋아 주고 슬픔은 우리의 영혼이 반성하도록 가르친다 기쁨에 들떠 있는 이가 인생의 의미에 배려할 확률은 높지 않다 반면, 슬피 우는 이는 눈물의 뒤뜰에서 반드시 하나 이상의 배움을 얻어 자신을 수정시켜 나간다 꿈을 잊어버리는 일 없이 슬픔이 주는 값진 교훈을 따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게시기간 : 2017. 2.12. ~ 2.18.) 1032 흔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이정노 나는 흔들리며 왔다 버스에서 전철에서, 사무실에서는 아래위로 때론 옆으로 흔들렸고 예전엔 아들이 흔들렸다 한때는 밥상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 견고한 아파트에서 아버지가 흔들리고 요즈음엔 남편이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하지만 내가 버즈두바이 초고층 빌딩처럼 내면이 불안하게 흔들려도 식구들이나 나를 보는 사람들은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이 나의 흔들림을 보는 날 나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게시기간 : 2017. 2.05. ~ 2.11.) 1031 이별, 그 따뜻함에 대하여 황경신 만약 우리가 영원히 이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만남도 애틋하게 여겨지지 않을 거야 우리가 무한한 존재라면 이 삶이 이렇게 소중하지도 않을 거야 우린 무지개를 찾아 길을 떠나지도 않을 테고 누군가를 다시 만났을 때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매일 나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열심히 생각을 하고 그것을 위해 눈물과 고통을 감사하는 것은 모든 것이 유한하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이별은 차가운 것이 아니야 사랑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처럼 (게시기간 : 2017. 1.29. ~ 2. 4.) 1030 그릇에 관하여 윤석택 얘야, 그릇은 담아내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인생살이란다 어머니의 손은 젖을 대로 젖어서 좀처럼 마를 것 같지 않다 젖은 손을 맞잡고 문득 펴 보았을 때 빈 손바닥 강줄기로 흐르는 손금 긴 여행인 듯 패여 왔구나 접시들은 더러움을 나눠 가지며 조금씩 깨끗해진다 헹궈낸 접시를 마른행주로 닦아내는 어머니의 잔손질, 햇살도 꺾여 차곡차곡 접시에 쌓인다 왜 어머니는 오래된 그릇을 버리지 못했을까 환한 잇몸의 그릇들 촘촘히 포개진다 나도 저 그릇처럼 닦아졌던가 말없이 어머니는 눈물 같은 물기만 정성스레 닦아낸다 그릇 하나 깨끗하게 찬장으로 올라간다 (게시기간 : 2017. 1.22. ~ 1.28.) 1029 겨울 나무 최아련 설레임으로 반짝였던 봄을 보내고 뜨거웠던 태양빛에 맞섰던 푸르름을 내려놓고 자랑하며 맺었던 열매도 거두고 겨울,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처음처럼 나는 다시 가난해졌다. 화려하지 않아도 지나온 시간이 가르쳐 준 소중한 것들 마음에 고이고이 새기고 다시 또 가야할 새 길 앞에 섰다.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가라앉히고 다시 만날 봄 작은 새잎을 만날 꿈으로, 태양보다 더 싱그럽게 푸를 내 여름과 아름답게 열매 맺을 가을을 기대함으로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아 춥고 외롭더라도 다시 내딛는 걸음 기쁨의 첫걸음 내딛고 소망으로 채우며 이 겨울, 나는 그렇게 시작을 준비한다. 이제 내 몸에 굵은 자국 하나 또 남겠네 (게시기간 : 2017. 1.15. ~ 1.21.) 1028 가벼워지기 이무원 채우려 하지 말기 있는 것 중 덜어내기 다 비운다는 것은 거짓말 애써 덜어내 가벼워지기 쌓을 때마다 무거워지는 높이 높이만큼 쌓이는 고통 기쁜 눈물로 덜어내기 감사기도로 줄여가기 날개가 생기도록 가벼워지기 민들레 꽃씨만큼 가벼워지기 (게시기간 : 2017. 1. 8. ~ 1.14.) 1027 새해엔 박선미 키가 작아서 할 수 없다고?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뚫고 노란 꽃잎 피워내는 민들레 이마에 솟은 저 샛노란 핏줄을 봐. 그래도? 날씨가 추워서 할 수 없다고? 지난 밤 서리에도 초록 손 내미는 보리 팔뚝에 솟은 저 푸른 힘줄을 봐.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내는 마음 버리는 거야. 시작도 하지 않고 못한다 하는 마음 버리는 거야. 새해엔. (게시기간 : 2017. 1. 1. ~ 1. 7.) 1026 송년인사 오순화 그대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대 올해도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대 올해도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대 올해도 내 눈물 받아 웃음꽃 피워주고 그대 올해도 밉다고 토라져도 하얀 미소로 달래주고 그대 올해도 성난 가슴 괜찮아 괜찮다고 안아주고 아플 때마다 그대의 따스한 손길은 마법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대의 품은 오늘도 내일도 세상에서 가장 넓고 편안한 집입니다 그대가 숨 쉬는 세상 안에 내심장이 뛰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대 올해도 살아줘서 살아있음에 큰 행복 함께 합니다 (게시기간 : 2016.12.25. ~12.31.)

3-21.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7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