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6 년
 

   2016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익스플로러 단축키(Ctrl+F)로 시 제목, 내용, 시인 이름을 검색(?) 할 수 있습니다.  ^^;

1027 새해엔 박선미 키가 작아서 할 수 없다고?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뚫고 노란 꽃잎 피워내는 민들레 이마에 솟은 저 샛노란 핏줄을 봐. 그래도? 날씨가 추워서 할 수 없다고? 지난 밤 서리에도 초록 손 내미는 보리 팔뚝에 솟은 저 푸른 힘줄을 봐.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내는 마음 버리는 거야. 시작도 하지 않고 못한다 하는 마음 버리는 거야. 새해엔. (게시기간 : 2017. 1. 1. ~ 1. 7.) 1026 송년인사 오순화 그대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대 올해도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대 올해도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대 올해도 내 눈물 받아 웃음꽃 피워주고 그대 올해도 밉다고 토라져도 하얀 미소로 달래주고 그대 올해도 성난 가슴 괜찮아 괜찮다고 안아주고 아플 때마다 그대의 따스한 손길은 마법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대의 품은 오늘도 내일도 세상에서 가장 넓고 편안한 집입니다 그대가 숨 쉬는 세상 안에 내심장이 뛰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대 올해도 살아줘서 살아있음에 큰 행복 함께 합니다 (게시기간 : 2016.12.25. ~12.31.) 1025 크리스마스에게 띄운 편지 김하인 지난 일 년 동안 모아온 햇빛과 꽃과 강 풍경을 담아 보내드립니다. 허틈 없이 아껴아껴 모아온 제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움을 보내드립니다. 이것을 가지고 당신 크리스마스를 행복하게 꾸미세요. 당신 마음을 따스하고 빛나게 해줄 장식으로 써주십시오. 당신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창가에 홀로 서서 촛불 모아들고 전 당신 행복함을 기뻐하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한 사람이 어둠을 지켜내는 것만큼 한 사람이 불빛처럼 따스해지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이 행복하기에 모자라는 기쁨이라면 오롯이 전 당신이 제 기쁨을 아낌없이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빛과 함께 태어나고 웃음소리 속에서 당신 은종이 울렸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당신 파티가 끝난 뒤 제 눈물 한 방울도 묻어 있음을 눈치 채주셨으면 합니다. 일 년 내내 당신만을 지켜보다가 맺힌 눈물 중에 한 방울입니다. 그 이외엔 크리스마스 전부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당신 충만될 수 있다면 전 성탄 트리가 되어 당신 창문 밑을 밤새워 지킬 겁니다. 이렇게 당신 가까이 있고 당신을 제가 사는 이 세계 한 모퉁이에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모를 제 사랑을 자축합니다. 제가 당신의 크리스마스입니다. (게시기간 : 2016.12.18. ~12.24.) 1024 찐빵 박형만 겨울에 도시로 전학 와 새 학교 갔다 처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녁이 오도록 집을 못 찾고 비슷비슷한 골목을 헤매다녔다 시골집에서는 저녁때가 되면 무쇠솥을 들썩이는 밥물의 김처럼 부엌문을 열고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만으로 동네 어디에서 놀고 있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의 힘으로 집에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며, 찐빵집 앞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겨울 저녁 찐빵집 앞을 지나가다 보면 그때처럼 추억의 온도로 부연 찐빵의 김에 내 자신을 맡기고 싶어진다 팥소 가득한 찐빵을 뜨겁게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하얀 김 속에서 그렇게, 집에 가다 말고 잠시 서 있고 싶어진다 (게시기간 : 2016.12.11. ~12.17.) 1023 가족과 가득 사이 이희섭 아내와 여행을 가다가 싸우고 돌아오는 길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어간다 '가득이세요' 라는 말이 '가족이세요?' 라는 말로 들리는 순간 가득과 가족 사이에서 잠시 묘연해진다 가득이라는 것은 바닥난 속을 온전히 채우는 것이고 가족이라는 것도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채우려 해도 금세 빠져나가는 사소한 빈틈 서로 다른 곳을 적시고 있는 건 아닐까 연료가 소진되며 자동차가 굴러가듯 그동안 우리 사이에 소진된 것은 무엇인가 바닥난 가족을 가득 채우러 다시 길을 떠난다 (게시기간 : 2016.12. 4. ~12.10.) 1022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향지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뒤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 분 걸어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게시기간 : 2016.11.27. ~12. 3) 1021 너라고 쓴다 정윤천 솜꽃인 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아득했을 거리를 너라고 부른다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저처럼의 하늘을 너라고 여긴다 그날부턴 당신의 등뒤로 바라보이던 한참의 배후를 너라고 느낀다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 아침의 먼 길을 너라고 한다 직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너라고 믿는다 생이 한 번쯤은 더 이상 직진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시간 속으로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순간을 너라고 이름 붙여주고 나면 불현듯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라곤 사라져버려선 사방에서 사방으로 눈이라도 멀 것만 같은 이 저녁의 황홀을 너라고 쓰기로 한다 (게시기간 : 2016.11.20. ~11.26) 1020 임경림 오래 닫아만 둔다면 그건 문이 아니야, 벽이지 열기 위해 잠시 닫아 두는 게 문이야 벌서는 아이처럼 너무 오래 나를 세워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본래 하나였던 세상, 나로 인해 나누어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안과 밖이 강물처럼 만나 서로 껴안을 수 있게 마음과 마음이 햇살 되어 따뜻이 녹여줄 수 있게 이제 그만 나를 활짝 열어주었으면 좋겠어 (게시기간 : 2016.11.13. ~11.19) 1019 입동(立冬)의 시 임강빈 땀 흘린 만큼 거두게 하소서 손에 쥐게 하소서 들판엔 노적가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주먹을 펴게 하소서 찬바람이 지나갑니다 뒤돌아보는 지혜를 주소서 살아 있다는 여유를 가르쳐주소서 떨리는 마음에 불을 지펴주소서 남은 해는 짧습니다 후회없는 삶 이제부터라는 것을 마음 편안히 갖게 하소서. (게시기간 : 2016.11. 6. ~11.12) 1018 고독 속의 행복 정숙자 좋은 책도 아니에요 두세 권 윗목에 놓고 쉬엄쉬엄 읽으며 살고 싶어요 많은 음식도 아니에요 상추 쑥갓 호미질하며 조용 조용히 살고 싶어요 옷이야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크면 줄이고 작으면 늘려 입지요 제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유리알처럼 영롱한 마음 죄 없이 저무는 하루이지요 그리고, 그리고 많은 노래도 뛰어난 노래도 아니랍니다 다만 꾸준히 부르면 그뿐 풀꽃 하나 새로이 피고 낙엽들 우수수 몰리는 저녁 행복도 쉬엄쉬엄 찾고 싶어요 (게시기간 : 2016.10.30. ~11. 5) 1017 이름 없는 풀 이산하 어느 것 하나 자기를 뽐내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성급하게 아우성치지도 않고 뿌리 없이 땅 위로 얼굴 내밀거나 줄기 없이 지 하늘인 양 열매 맺지도 않았다 그 어느 것 하나 고르지 못한 땅을 탓하며 혼자 뿌리 뻗지도 않았고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씨를 옮기며 떼 지어 함께 사는 것을 잊지도 않았다 그래서 꽃밭에 앉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풀밭에 앉으면 마음이 넉넉해지는가 보다 (게시기간 : 2016.10.23 ~10.29) 1016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허수경 그 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 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 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게시기간 : 2016.10.16 ~10.22) 1015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작가미상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게시기간 : 2016.10. 9 ~10.15) 1014 청혼 조기영 외로움이 그리움이 삶의 곤궁함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작은 옥탑방에서도 그대를 생각하면 까맣던 밤하늘에 별이 뜨고, 내 마음은 이마에 꽃잎을 인 강물처럼 출렁거렸습니다 늦은 계절에 나온 잠자리처럼 청춘은 하루하루 찬란하게 허물어지고 빈 자루로 거리를 떠돌던 내 영혼 하나 세워둘 곳 없던 도시에 가난한 시인의 옆자리에 기어이 짙푸른 느티나무가 되었던 당신 걸음마다 질척이던 가난과 슬픔을 뒤적여 밤톨 같은 희망을 일궈주었던 당신 슬픔과 궁핍과 열정과 꿈을 눈물로 버무려 당신은 오지 않은 내일의 행복을 그렸지요 그림은 누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눈이 시렸을 뿐! 수 많은 기억들이 봄날의 벗꽃처럼 흩날려버릴 먼 훗날, 어려웠던 시간, 나의 눈물이 그대에게 별빛이 되고 나로 인해 흘려야했던 그대의 눈물이 누군가에게 다시 별빛이 될 것입니다 가을을 감동으로 몰고 가는 단풍의 붉은 마음과 헛됨을 경계하는 은행의 노란 마음를 모아 내 눈빛이 사랑이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의 마음 속으로 숨어버린 그 날 이후 내 모든 소망이었던 그 한마디를 씁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푸른 하늘에 구름을 끌어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대의 사랑에 대하여 쓰며 천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날들입니다 (게시기간 : 2016.10. 2 ~10. 8) 1013 여보라는 말 윤석정 연애시절, 나는 은근슬쩍 당신에게 여보라고 불러봐 했더니 그 말이 어색했던 당신은 여보를 거꾸로 바꿔서 '보여?' 라고 묻고는 딴청을 피웠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던 날 당신은 '내 마음이 보여?' 라고 묻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랑해' 라고 속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새신랑이 된 나는 당신에게 '보여?' 라고 물었더니 당신은 내 어때에 손을 얹으며 여보라고 말했다 여보라는 말이 어찌나 아늑하던지 나는 사랑해 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내 마음이 보여? 내 사랑이 보여? 정말 내가 보여? 라고 묻지 않고 단지 여보라고 말할 것 같다 여보라는 말 입속에 가만히 숨겨둘 수 없어서 부르면 부를수록 보여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커져만 가는 말 (게시기간 : 2016. 9.25 ~10. 1) 1012 구절초 박상희 강 언덕배기 가슴이 탈수록 안으로 파고들어 거울처럼 제 몸 비춰가며 세월의 강바람에도 언덕배기 산기슭에 붙어 바들바들 하더니 한 생을 살기위해 얻어낸 온 우주의 모든 것을 스스로 다 받아 살아 왔구나. 가슴 조이던 시간은 가고 참아온 인내의 향기로 너 거기 있음을 알아 이제야 생각하니 너보다 긴 날을 살고도 한 호흡 향기 없는 내가 부끄러워 강물에 일렁이는 너를 본다. 물에 잠긴 세월을 흔들어 본다. (게시기간 : 2016. 9.18 ~ 9.24) 1011 생명이 순수할수록 권도중 생명이 순수할수록 자주 멍이 들듯이 사람도 순수할수록 꽃처럼 멍이 든다 몸속에 쌓아둔 꽃은 무엇으로 못 지운다 잘 살아 아프지 않고 꽃 지고 철이 가도 못 잊는 세월에는 다친 디엔에이가 있다 상처도 깊은 사랑은 찾아가는 힘이 세다 (게시기간 : 2016. 9.11 ~ 9.17) 1010 아무도 없는 저녁을 위하여 정복여 우선 둥근 손잡이를 누른다 그리고 왼쪽으로 천천히 돌리면 프로판 가스를 밀어올리며 당겨지는 생각들 위에 올려진 인덕션 냄비가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수도꼭지에서 뽑아낸 적당한 분량의 시간은 뜨거운 바닥에서 하나둘 기억의 공기방울을 만들고 있다 젖은 기억들이 바닥을 떠나 물의 표면으로 뛰어오른다 무수한 기억의 입들이 보인다 이쯤에서 토막친 물 좋은 오늘을 집어넣는다 어슷 썰은 푸른 기대도 한웅큼 베란다 너머 자라던 저녁해도 조금 뜯어다 넣고 골목을 뛰던 소리들도 다져넣으면 오늘이 부드럽게 익어간다 어둠을 담았던 가장 움푹한 그릇을 챙기며 선반 위에 낮게 깔리는 고요로 간을 맞추는 오늘의 요리, 빈방 가득 저녁이다 (게시기간 : 2016. 9. 4 ~ 9.10) 1009 참 서툰 사람들 박광수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대화에서 서툴다 어떤 사람은 화해에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이별에 서툴다 어떤 사람은 일이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젓가락질이 서툴다 어쨌든 그들은 서툴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스스로 괜히 못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 서투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상일이 원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법인데 잘 풀리는가 싶다가도 꼬이기 일쑤인 게 인생인데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계속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바람둥이도 차일 때가 있고, 아무리 말을 잘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서투르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다만 서투르다는 사실을 느끼거나 인정한다면 나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지자 서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너무 인색하다 서툴다는 것은 죄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서툰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미 서툰 사람이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모르는 그래서 잘 배우려는 학생일 뿐이다 그러니 조금만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자 그것이 바로 서툰 사람들이 손톱만큼이라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게시기간 : 2016. 8.28 ~ 9. 3) 1008 마중물 조용순 바삭거리며 타는 목마름으로 허공에 눈길이 길어진다는 그대 가슴에 내 작은 가슴 열어 조금 고여있는 물을 부어주었더니 그대, 저 깊은 곳 어디에서 맑고 시원한 물을 콸콸콸 쏟아내며 달려오고 있으니 갈바람 살짝 묻어나는 새벽길에서 그대를 마중하며 오늘 살아있다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지고 있어 우리 사랑은 아직도 지상에 머물러 있고 그대와 나는 지금도 눈빛이 빛나고 있는 걸 사는 날이 더러 아프게 해서 타는듯한 울음이 솟구치는 날이면 우리 서로 맑은 물로 만나 이렇게 마주 보고 갈증을 달래주자 하늘과 자연과 우리 사랑 머무는 이곳에서 (게시기간 : 2016. 8.21 ~ 8.27) 1007 단순하게 조금 느리게 한수산 우리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여자의 많은 것들 가운데 한 조각을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한 남자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그 남자를 이루고 있는 많은 조각 가운데 겨우 하나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조각을 우리는 그 남자의 혹은 그 여자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사랑에 빠집니다 미움도 거기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한 조각이 어느 날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그 남자는 자신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다른 많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때의 그 실망, 미움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조금 물러서서 바라보면, 다시 되돌려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 사람에게서 너무 많은 다른 것을 잊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게시기간 : 2016. 8.14 ~ 8.20) 1006 딸은 좋다 채인선 딸은 좋다 딸을 안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 돌아본다 딸이 보조개를 지으며 웃으면 “엄마 닮아 웃는 것도 예쁘네요” 라고 말한다 딸은 좋다 딸은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가 해 줄게요” 한다 엄마가 괜찮다 해도 딸은 언제나 엄마가 하는 일을 자기도 하고 싶어한다 딸은 좋다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 마중을 나갈 수도 있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지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엄마가 좋아하는 포도를 한아름 사올 수도 있다 딸은 좋다 목욕탕에 같이 가서 서로 등을 밀어줄 수 있으니까 딸은 엄마가 자기 등을 밀어줄 때처럼 고루고루 정성스레 민다 엄마는 속으로 생각한다 우리 딸이 다 컸다고 딸은 좋다 엄마에게 괜히 화를 내고는 한 순간도 못되어서 “엄마 미안해요” 하고 쪽지를 쓴다 엄마는 그 쪽지들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엄마는 그런 딸이 좋다 (게시기간 : 2016. 8. 7 ~ 8.13) 1005 제안 박성호 우리, 더디게 사랑합시다 비가 아니면 시들고 마는 꽃에게도 매일처럼 비가 내려주지는 않습니다 너무 세찬 비는 생명의 뿌리를 뽑아가듯이 너무 벅찬 사랑의 비는 사랑의 뿌리를 휩쓸어갑니다 언제나 아직은 서로를 사랑해야 할 여지가 남아있도록 언제나 부족한 듯 서로를 바라보고 아쉬움으로 서로를 기억합시다 잊어도 잊혀도 다시 돌아오는 이 부활의 계절처럼 우리, 더디게 사랑합시다. (게시기간 : 2016. 7.31 ~ 8. 6) 1004 아내의 종종걸음 고증식 진종일 치맛자락 날리는 그녀의 종종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집 안 가득 반짝이는 햇살들이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몸 슬슬 물들기 시작하는 화단의 잎새 위로 이제 마흔 줄 그녀의 언뜻언뜻 흔들리며 가는 눈빛. 숭숭 뼛속을 훑고 가는 바람조차도 저 종종걸음에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방 안 가득 들어선 푸른 하늘이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 발걸음이 햇살이고 하늘인 걸 종종거리는 그녀만 모르고 있다. (게시기간 : 2016. 7.24 ~ 7.30) 1003 여행 손광세 떠나면 만난다 그것이 무엇이건 떠나면 만나게 된다 잔뜩 찌푸린 날씨이거나 속잎을 열고 나오는 새벽 파도이거나 내가 있건 없건 스쳐갈 스카프 두른 바람이거나 모래톱에 떠밀려온 조개껍질이거나 조개껍질처럼 뽀얀 낱말이거나 아직은 만나지 못한 무언가를 떠나면 만난다 섬 마을을 찾아가는 뱃고동 소리이거나 흘러간 유행가 가락이거나 여가수의 목에 달라붙은 애절한 슬픔이거나 사각봉투에 담아 보낸 연정이거나 소주 한 잔 건넬 줄 아는 텁텁한 인정이거나 머리카락 쓸어 넘기는 여인이야 못 만나더라도 떠나면 만난다 방구석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무언가를 떠나면 만나게 된다 산허리에 뭉게구름 피어오르고 은사시나무 잎새들 배를 뒤집는 여름날 혼자면 어떻고 여럿이면 또 어떤가? 배낭 매고 기차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볼 일이다 (게시기간 : 2016. 7.17 ~ 7.23) 1002 강물과 사랑은 김창제 강물이 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사랑이 깊으면 삐걱거리지 않는다 물은 물의 깊이로 아름답게 흐르고 사랑은 사랑의 의미로 잔잔하게 흐른다 저 강물은 어디에서부터 흘러온 것일까 내 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될까 저 강물은 어디 가서 굽이 돌까 내 사랑은 어디에서 쉬어 갈까 내 사랑 소리 없는 흐름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강물의 깊이로 꽃피는 몸짓으로 조용하게 왔다 강물이 깊으면 소리 나지 않는다 사랑이 깊으면 싸우지 않는다 (게시기간 : 2016. 7.10 ~ 7.16) 1001 가족사진 이창수 할머니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은 카메라를 보고 있다 아니, 카메라가 초점에 잡히지 않는 우리 가족의 균열을 조심스레 엿보고 있다 더디게 가는 시간에 지친 형들이 이러다 차 놓친다며 아우성이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담장처럼 잠시 후엔 누가 붙잡지 않아도 제풀에 지쳐 제각각 흩어져 갈 것이다 언제나 쫓기며 살아온 우리 가족 무엇이 그리 바쁘냐며 일부러 늑장을 부리시는 아버지의 그을린 얼굴 위로 플래시가 터진다 순간, 담장을 타고 올라온 노오란 호박꽃이 환하게 시들어간다 (게시기간 : 2016. 7. 3 ~ 7. 9) 1000 관계 이달균 혼자 이곳까지 걸어왔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보다 먼저 걸어와 길이 된 사람들 그들의 이름을 밟고 이곳까지 왔느니 별이 저홀로 빛나는 게 아니다 그 빛을 이토록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스스로 저물어 어두워지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16. 6.26 ~ 7. 2) 999 장마 안상학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흘러 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게시기간 : 2016. 6.19 ~ 6.25) 998 자벌레, 자벌레가 변종태 오일시장에서 열 개에 오백 원 주고 사 왔다는, 칠순 노모가 심어놓은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십 배는 됨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 고민하면서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온몸으로 세상을 재던 시절이 있었지 온몸으로 세상의 넓이를 재느라 어미의 생을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이의 상처를 갉아먹기도 하면서, 아, 나도 노모(老母)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게시기간 : 2016. 6.12 ~ 6.18) 997 간고등어 이상호 우리 엄마 장보따리 속에는 어김없이 간고등어가 들어 있었다 5일마다 우리 집으로 팔려오던 등이 시퍼런 바다 한 손 절고 절어 이제는 비린내도 안 나는 우리 어머니 등 시린 삶 한 접시 생각난다 (게시기간 : 2016. 6. 5 ~ 6.11) 996 오늘도 좋은 하루 김은주 누군가의 인생은 오늘 정원에 꽃을 피웠다. 누군가의 인생은 오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켰다. 누군가의 인생은 오늘 종이접기를 가르쳐주었으며, 누군가의 인생은 오늘 날아가는 풍선을 잡아주었다. 매일매일이 기회다. 누군가의 인생이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꽃이 되고, 지렛대가 되고,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는.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다 (게시기간 : 2016. 5.29 ~ 6. 4) 995 부부 오창렬 늘 허투루 나지 않은 고향 길 장에나 갔다 오는지 보퉁이를 든 부부가 이차선 도로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고 걷는다 이차로 간격의 지나친 내외가 도시 사는 내 눈에는 한없이 촌스러웠다 속절없는 촌스러움 한참 웃다가 인도가 없는 탓인지도 모르지 물건 사다 말싸움을 했을지도 몰라 나는 또 혼잣생각에 자동차를 세웠다 차가 드물어 한가한 시골길을 늙어 가는 부부는 여전히 한 쪽씩 맡아 걷는다 뒤돌아봄도 없는 걸음이 경행(經行) 같아서 말싸움 같은 것은 흔적도 없다 남편이 한 쪽을 맡고 또 한 쪽을 아내가 맡아 탓도 상처도 밟아 가는 길 안팎으로 침묵과 위로가 나란하다 이런저런 궁리를 따라 길이 구불거리고 묵묵한 동행은 멀리 언덕을 넘는다 소실점 가까이 한 점 된 부부 언덕도 힘들지 않다 (게시기간 : 2016. 5.22 ~ 5.28) 994 시냇물 같은 사람 제미정 나는 바다 같은 사람보다는 시냇물 같은 사람이 좋다 끝없이 넓고 짙은 푸름이 있지만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바다 같은 사람보다는 얕은 물이 쉼 없이 흐르며 그 안에 갖가지 모양의 돌을 제 몸처럼 안고 둥글게 세월을 먹는 시냇물 같은 사람이 더 좋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고도 말간 웃음으로 잔잔히 흘러가는, 비가 오면 빗물의 손을 잡고 기나긴 동행도 즐거움이라 노래하는, 거친 파도도 풍랑도 모르고 조용히 인생을 유영하는 듯하지만 결코 주저하거나 멈추는 법이 없는 나는 그런 시냇물 같은 사람이고 싶다 (게시기간 : 2016. 5.15 ~ 5.21) 993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류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슬픔을 슬픔답게 껴안을 수 있는 일 아픔을 아픔답게 앓아낼 수 있는 일 먼 길의 별이여 우리 너무 오래 떠돌았다 우리 한 번 눈맞춘 그 순간에 지상의 모든 봄이 꽃피었느니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푸른 종 흔들어 헹구는 저녁답 안개마저 물빛처럼 씻어 해맑게 갈무리할 줄 아는 일 사랑 때문에 사랑 아닌 것마저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일 이제 우리가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게시기간 : 2016. 5. 8 ~ 5.14) 992 장시하 삶의 우물에 추억의 두레박을 던지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도 멈추고 싶으리만큼 행복한 추억 하나 쯤 있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오늘의 어려운 순간도 그저 추억일 뿐 가야할 길이 남아있는 그 순간까지 삶을 불행이라, 행복이라 단정 짓지 마라 불행이라 생각했던 그 길에 행복이 싹트기도 하고 행복이라 자신하던 그 길에 불행이 덮쳐 오기도 하는 것 언젠가 가야할 길이 없는 날이 오더라도 아쉬워마라 가야할 길이 없는 날, 불행했던 삶도 행복이라 생각하리라 가야할 길이 없는 날, 행복했던 삶에 더욱 감사하리라 가야할 길이 없는 날,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오늘, 당신이 걷는 길에 혼신을 다하라 (게시기간 : 2016. 5. 1 ~ 5. 7) 991 나이라 말하지 마오 김도환 누가 나이를 묻거든 나이라 말하지 마오 시퍼런 청춘의 심장을 토해 인생을 쌓았다고 붉은 열정으로 생의 멋을 채웠노라 말해주오 나이 몇이다 하지 말고 멋이 몇이다 말해주오 봄날의 창변에서 피어나고 뙤약볕의 불을 모아 멋을 담은 것이니 시들어 간다 말하지 말고 서러워 마오 낙화의 잎은 황금색으로 물든 영혼이라 하오 눈물 나게 눈이 부신 사랑 하나 멋으로 담았을 창공의 푸르름을 비상하는 멋으로도 담았을 목멤의 절규조차 한바탕 웃음의 멋으로 담았을 그대들의 연륜을 나이라 말고 생의 멋이라 말해주오 (게시기간 : 2016. 4.24 ~ 4.30) 990 물들어 간다는 것은 조동례 물들어간다는 것은 마음 열어 주변과 섞인다는 뜻이다 섞인다는 것은 저마다의 색을 풀어 닮아간다는 것이니 바람이 불 때마다 밀었다 당겼다 밀었다 당겼다 닫힌 마음이 열릴 때까지 서로의 체온을 맞춰가는 것이다 태양이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도 봄꽃이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도 마음이 닮아가는 것이고 마음이 닮았다는 것은 편하다는 것이고 편하다는 것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네가 아프면 곧 내가 아프다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16. 4.17 ~ 4.23) 989 꽃밭 김수목 꽃밭 하나를 갖고 싶다 힘이 자꾸 빠지는 흐린 봄날에는 작은 꽃밭 하나만이라도 갖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 이리저리 벌떼들이 잉잉거리는 오후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작은 꽃밭 하나를 갖고 싶다. 물을 뿌리고 희망을 키우는 절망하지 않는 작은 꽃밭 하나를 흐린 봄날에는 갖고 싶다. (게시기간 : 2016. 4.10 ~ 4.16) 988 사랑초 박경순 봄 햇살과 눈 맞춘 까닭에 몸속의 피가 꽃을 피우려나 봅니다. 심장을 데우고도 남은 뜨거움으로 맥박과 호흡은 제 박자를 놓치고 시선은 먼 데 소식을 들으려 초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샛길로 접어든 호접 나비의 감감무소식에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짙은 향기를 발하려는 몸살쯤으로 위안하렵니다. 혹독하게 치루고 나면 바람결에 전해지는 환각만으로도 화사하게 피어날 가슴 속에만 살 수 있는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게시기간 : 2016. 4. 3 ~ 4. 9) 987 오늘 하루 공영구 모처럼 저녁놀을 바라보며 퇴근했다 저녁밥은 산나물에 고추장 된장 넣고 비벼먹었다 무사히 하루가 지났건만 보람될 만한 일이 없다 그저 별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라고 자책하면서도 남들처럼 세상을 탓해보지만 늘 그 자리에서 맴돌다 만다 세상살이 역시 별 것 아니라고 남들도 다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살라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 생각났다 사실 별 것도 아닌 것이 별 것도 아닌 곳에서 별 것처럼 살려고 바둥거리니 너무 초라해진다 한심한 생각에 눈감고 잠 청하려니 별의별 생각들 다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오늘 하루 우리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무탈한 모습들 보니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워 행복의 미소 눈언저리까지 퍼진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되었으리라 (게시기간 : 2016. 3.27 ~ 4. 2) 986 사랑하라 상처가 기적을 선물할 때까지 이희숙 하나의 사랑을 보낸 가슴엔 더 이상 봄날은 없다고 말하지 마라 척박한 가슴에도 거짓말처럼 봄은 오나니 사랑하라 처음처럼 마지막이듯 사랑하라 상처가 기적을 선물할 때까지 사랑하라 비바람에 견딘 나무가 아름다운 꽃과 튼튼한 열매를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게시기간 : 2016. 3.20 ~ 3.26) 985 하루를 지내는 동안 차정미 하루를 지내는 동안 슬픔의 무게보다 기쁨의 무게 더 무거워지게 하소서 미움의 부피보다 사랑의 부피 더 두터워지게 하소서 불평의 길이보다 자족함의 길이 더 길어지게 하시고 불화의 면적보다 화평의 면적 더 넓어지게 하소서 베풂의 두께 해를 거듭할 때마다 두꺼워지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굵어지게 하시고 포용력의 깊이 심해처럼 깊어지게 하소서 은유함이 강물처럼 넘실넘실 넘쳐나게 하소서 (게시기간 : 2016. 3.13 ~ 3.19) 984 밥생각 김기택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게시기간 : 2016. 3. 6 ~ 3.12) 983 그 한마디 말 김장호 중학생 아들에게 용돈 줄 때마다 봉투에 넣어주는 쪽지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그 옛날 외양간 소똥 치우던 손으로 내 종아리 매질했던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문 막걸리 냄새나던 당신의 모국어 세상과 맞서게 만든 금쪽같은 말 문득 새벽잠 깨면 콧등이 시큰해지는 말 언젠가 내 아들의 등 뒤에서 힘이 될 그 한마디 말 출근길 양복 주머니에 든 고교생 딸의 쪽지 "아빠, 사랑해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응원 지갑 속 복권보다 더 힘나는 말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듯 농사꾼 내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말 입가에 맴돌기만 했던 말 후회는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것 아, 미루고 미루다 억울하게 하지 못한 그 한마디 말 늦은 밤 현관 밖을 들락거리던 아내 중학생 아들에게 현관문 열어주며 내색 않고 던지는 첫마디 "밥은 먹었니?" 이슥한 밤 아버지 몰래 대문 따주시던 내 어머니 생전에 하시던 말 시외 전화할 때마다 꺼내시던 첫마디 김치찌개 냄새나던 당신의 모국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녹아 있던 아랫목 이불 밑 밥그릇 같은 그 한마디 말 (게시기간 : 2016. 2.28 ~ 3. 5) 982 손기섭 언제부턴가 내 등에 점점 커 가는 콩알만한 혹 하나가 생겼는데 손에 닿지 않아 만질 수도 없고 거울로 비춰봐도 잘 보이지도 않고 가끔 가려운 듯 하면서 신경을 긁는다 손수 칼 잡을 때 같으면 친구 이리와 그까짓 것 문제없어 하고 손쉽게 떼어내 줄 것 같은 것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렇게 해줄 만한 친구 하나 없다 나온지 오래 됐어도 근무했던 병원에 가면 마음 써줄 후배가 제자도 있겠지만 그 까다로운 수속이며 절차며 어쩔 수 없이 번호가 되어 기다려야 하고 그 밖의 처지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번지도 잘 모르는 곳에서 눈물이 난다 (게시기간 : 2016. 2.21 ~ 2.27) 981 겨울 냉이 고명수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더듬더듬 찾아내어 검불을 뜯어낸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가파른 삶의 벼랑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서슬 푸른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서슬 푸른 눈으로 살아야 하리라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온몸을 우려내어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엔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에도 숨어있을 냉이, 환한 한 마디의 말씀이 오랜 궁리와 연찬에서 솟아나듯이 청빙(淸氷)을 뚫고 겨울 냉이는 자란다 아니 자라야 한다 (게시기간 : 2016. 2.14 ~ 2.20) 980 별은 다정하다 양애경 집에 돌아오며 언덕길에서 별을 본다 별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별은 그저 자기 할일을 하면서 반짝반짝하는 거겠지만 지구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내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눈에 닿는 별빛이 몇만 년 전에 출발한 것이라든지 그 별이 이미 폭발하여 우주 속에 흩어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든지 보이저가 가보니까 토성의 위성은 열여덟 개가 아니라 사실은 스물한 개였다든지 그런 걸 알아도 그렇다 오히려 나도 다음 生에는 작은 메탄 알갱이로 푸른 해왕성과 얼켜 천천히 돌면서 영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좋겠다 싶다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작은 사람 같아서 가족의 식탁에 깨끗이 씻은 식기를 늘어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냄비를 가운데 내려놓는 여자 같아서 별은 다정하다 (게시기간 : 2016. 2. 7 ~ 2.13) 979 내 작은 기도는 황근남 내 작은 기도 하나는 아이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을 때 말하는 것 내 작은 기도 하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즐겁게 노는 아이들만의 꽃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것 지금의 내가 소중하듯 아이들의 지금의 시간도 소중한 것임을 잊지 않는 것 (게시기간 : 2016. 1.31 ~ 2. 6) 978 일상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 신해숙 빨래를 하다가 고무장갑을 벗고 차를 끓이게 하는 사람. 서점에 들렀을 때 같은 책을 두 권 사게 만드는 사람. 홀로인 시간, 거울 속의 나이든 나에게 소녀 같은 미소를 짓게 하는 사람. 안 마시던 커피를 하루에 두어 잔은 꼭 마시게 하며 그때마다 살포시 가슴에 내려앉는 사람.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며 콧노래를 부르는 여유로운 정서를 가진 사람. 굳이 선을 그으라면 헤어짐이 예견된 사선보다는 한결같이 머무를 평행선 같은 사람. 낮게 핀 야생화에게 경의를 표하며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일상에서 만나고 싶다 (게시기간 : 2016. 1.24 ~ 1.30) 977 안기기, 안아주기 이병철 세상의 가슴 가운데 시리지 않은 가슴 있더냐 모두 빈 가슴 안아주어라 안기고 싶을 때 네가 먼저 안아라 너를 안는 건 네 속의 나를 안는 것 네 가슴 속 겁 먹고 수줍던 아이 허기져 외롭던 아이를 무엇이 옳다 누가 그르다 어디에도 우리가 던질 돌은 없다 포용이란 포옹이다 닭이 알을 품듯 다만 가슴을 열어 그렇게 품어 안는 것 가슴에 가슴을 맞대고 심장에 심장을 포개고 깊은 저 강물 소리 듣는 것 저 간절한 눈동자 묻어둔 저 그리움 가슴으로 품어 환히 꽃피우는 것 (게시기간 : 2016. 1.17 ~ 1.23) 976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 스님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거리감, 쉼표 때문입니다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말과 말 사이의 적당한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쉼 없이 달려 온 건 아닌지 내가 쉼 없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돌아봐야 합니다 결정을 내려야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쉬이 결정하기 어렵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시간이란 특효약을 주고 좀 쉬면 무의식에서 계속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이틀 후, 사나흘 후에 걷다가 밥 먹다가 잠에서 깨다가 친구와 대화하다가 문득 답이 알아져요 내 무의식을 믿고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 (게시기간 : 2016. 1.10 ~ 1.16) 975 사람은 누구나 씨앗을 품고 산다 장종근 사람은 누구나 씨앗 하나씩은 품고 산다 때가 되면 언제든 꽃으로 필 수 있는 씨앗이다 비록 모양도 색깔도 향기도 다르긴 하지만 절대로 독이 되지 않고 칼이 되지 않는 꽃으로 피면 그만인 씨앗 하나 씩을 품고 산다 어떤 꽃으로 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보기 좋게 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꽃일 수 있다는 꽃이 된다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자랑스러운 씨앗이다 숨 쉴 틈도 없이 날아드는 벌 나비의 폭력과 낙화를 서두르는 바람의 횡포조차도 그에게는 몸살 하는 기쁨일 뿐이다 (게시기간 : 2016. 1. 3 ~ 1. 9) 974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 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게시기간 : 2015.12.27. ~ 2016. 1. 2)

3-20.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16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