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09 년
 

 2009년 1월부터 12월까지 화장실에서 읽는 시 입니다. (게시일 내림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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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설날 아침 김동리 새해라고 뭐 다른 거 있나 아침마다 돋는 해 동쪽에 뜨고 한강은 어제처럼 서쪽으로 흐르고 상 위에 떡국 그릇 전여 접시 얹혀 있어도 된장찌개 김치보다 조금 떫스름할 뿐 이것저것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그저 그렇고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한 해 한 번씩 이 아침에 나는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 입는다 (게시기간 : 2009.12.27.∼2010. 1. 2.) 660 한 세상 박이도 짧은 한 평생이라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구나 안경알을 닦으면 희미하게 생각나는 지난 일들 가다가 가다가 서글퍼 주저앉으면 안경알 저쪽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짧은 희망 다시 가다가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게시기간 : 2009.12.20.∼12.26.) 659 눈꽃 최석우 누군가 말했었지 너 있는 곳에 눈꽃으로 떨어지고 싶다고 언제나 너를 덮는 눈꽃이 되고 싶다고 누군가 말했었지 독설을 퍼붓는다고 네 아픈 가슴이 달래어질 수는 없다고 그래도 세상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이 더 많다고 누군가 말했었지 세상을 살면서 너처럼 불확실한 것은 없었다고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는 확신을 달라고 가버린 세월 아득한 날처럼 스러지는 눈꽃 지금 그 사람 어디 있는지 나도 그를 덮는 눈꽃으로 떨어지고 싶다고 숨어 써 보네 (게시기간 : 2009.12.13.∼12.19.) 658 겨울 과메기 이영옥 바람을 무던히도 되받아치며 너는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단련된 맷집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추억이 사라지는 일, 마른 아가미 속에 감추어둔 언약 바람 속에 뱉어내고 내장까지 훑어낸 뱃가죽에 행여 한 점 애간장이 묻어있다 해도 이젠 덮어두자 온 몸에 하얗게 소금 꽃 핀다 붙잡아도 갈 걸 뻔히 알면서도 하얀 손가락 흘리던 파도 아픈 듯 뒤돌아보면 가늘게 떨며 따라오던 구룡포 눈썹 달 줄에 묶인 과메기처럼 매운 바람을 헤엄쳐 스스로 깊은 맛을 품을 때까지 혹한의 중심부로 나를 밀어넣어야 했던 그해 겨울 진눈깨비 뿌려대는 국도를 따라오며 나는 뜻하지 않게 너와의 약속을 깨던 적이 있었다 (게시기간 : 2009.12. 6.∼12.12.) 657 고단 (孤單) 윤병무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내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만남과 손을 놓겠지만 힘이 풀리는 손을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아내의 손을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나처럼 아내도 잠시 내 손을 받치고 있다가 내 체온(體溫)이 변하기 전에 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내 따라 잠든 내 코고는 소리를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게시기간 : 2009.11.29.∼12. 5.) 656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는 없는 내 곁에서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게시기간 : 2009.11.22.∼11.28.) 655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장진성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 몰랐다 당신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원을 쥐어 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 빵 사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게시기간 : 2009.11.15.∼11.21.) 654 연시 나진희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름 내내 푸른 잎 사이 있는 듯 없는 듯 서두르지 않는다. 붉게 무르익어 단연 돋보일 때까지 풋감은 아무도 찾지 않기에 덜 익은 감은 떫은 맛만 나기에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르르 녹아드는 아이스크림 같은 이 맛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지난 여름 태풍에 떨어진 감처럼 아무것도 아닌 나는 아직 풋감이다. (게시기간 : 2009.11. 8.∼11.14.) 653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이십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게시기간 : 2009.11. 1.∼11. 7.) 652 구석 이창건 나는 구석이 좋다. 햇살이 때때로 들지 않아 자주 그늘지는 곳 그래서 겨울에 내린 눈이 쉽게 녹지 않는 곳 가을에는 떨어진 나뭇잎들이 구르다가 찾아드는 곳 구겨진 휴지들이 모여드는 곳 어쩌면 그 자리는 하느님이 만든 것인지도 모르지. 그곳이 없으면 나뭇잎들의 굴러다님이 언제 멈출 수 있을까. 휴지들의 구겨진 꿈을 누가 거두어주나. 우리들 사랑도 마음 한구석에서 싹트는 것이니까. (게시기간 : 2009.10.25.∼10.31.) 651 가을들녘에서 이병금 머리 위를 떠가는 뭉게구름이 바람에 불리어 이리저리 들풀처럼 흩어져가는 날 하늘 멀리 떠나갔던 그 사람이 빈 촛대마다 초롱꽃 가득 켜들고 가을 들녘으로 돌아오고 있다 일생 동안 몇 번인가 사람에게는 남모르게 기적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눈을 감아도 황금빛만 너울너울 노을들길을 따라 피어오르고 있다 (게시기간 : 2009.10.18.∼10.24.) 650 그 젖은 단풍나무 이면우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게시기간 : 2009.10.11.∼10.17.) 649 국화가 피는 것은 길상호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게시기간 : 2009.10. 4.∼10.10.) 648 추석 엄원용 꼭 제사를 지내야만 추석이더냐 퍼내도 퍼내도 부족함이 없는 저 밝은 달을 그릇마다 담아 형님 아우님 만나는 기쁨을 상마다 푸짐하게 차려놓고, 아들 손자 며느리 한 자리에 모여앉아 조상님 고마운 생각에, 대신 살아계신 부모님 정성껏 모시고 올해도 잘 익은 과일들처럼 자식들 무럭무럭 자라게 하시고, 향기 품어내게 하시고 우리 집 잘되고, 이웃이 잘되고, 이 나라 잘되라고 빌고 빌면, 그제야 오늘이 진정 추석날이지. (게시기간 : 2009. 9.27.∼10. 3.) 647 운동장에서 한성례 푸듯푸듯 흙먼지가 날아왔다. 살끝에서부터 간지럼타는 유년의 기억들 미루나무 꼭대기에 고추잠자리가 맴돌면 어지럼증처럼 들판 끝을 바라보았던 들녘으로 난 나의 운동장, 끝은 아득했다. 벼가 누럿누럿거리면 한귀퉁이 두레박 우물물이 가득 고이고 운동회는 시작되었다 만국기아래 아이들이 곰실곰실 꼭둑각시춤을 추고 있다. 물 말라가는 버드나무 아래서 실눈 뜨고 바라보는 도시의 운동회 내 여덟살에서 자꾸만 눈끝은 흐려지고 훌쩍 내 여기 아득하게 앉아 있다. (게시기간 : 2009. 9.20.∼ 9.26.) 646 놋세숫대야 김선태 아직도 고향집엔 놋세숫대야가 있다 늙수그레한 어머니처럼 홀로 남아 있다 물을 비우듯 식구들이 차례로 떠나고 시간은 곰삭아 파랗게 녹슬었다 어머니, 볏짚에 잿물 발라 오래도록 문지르면 다시 환하게 밝아오던 그때처럼 추억은 때로 보름달처럼 둥글고 환하다 가만가만 두드리면 잊혀진 목소리들도 끈끈하게 살아서 돌아오니 아, 그래 너는 징소리처럼 기일고 나즈막한 울음을 속에다 감추고 있었구나 다시 샘물을 퍼 담고 어푸어푸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하다 말고 물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낯설게 흔들리는 내 얼굴이 하나 있고 그 위로 식구들 얼굴이 아련히 얼비친다 아직도 고향집엔 놋세수대야가 있다 결코 깨지지 않을 황동신화처럼 숨쉬고 있다 (게시기간 : 2009. 9.13.∼ 9.19.) 645 늙은 말잠자리의 고독 최승호 이슬 희어지는, 백로(白露)도 지난 늦가을 연못을, 철지난 말잠자리가 날아다닌다. 텅 빈 연못을 혼자서, 혹시 살아남은 말잠자리가 있나 하고, 지나온 길도 다시 가보며, 회백색 갈대꽃들이 시드는 연못 가장자리로 날아다니는 늙은 말잠자리의 고독은, 아마 당신이 말잠자리가 되어 몸소 날아다녀봐야 알 수 있으리. (게시기간 : 2009. 9. 6.∼ 9.12.) 644 9월이 오면 김사랑 들에다 바람을 풀어 주세요 타오르는 불볕 태양은 이제 황금 빛으로 바꿔주시고 거두어 드릴 것이 없어도 삶을 아프게 하지마소서 그동안 사랑없이 산 사람이나 그동안 사랑으로 산 사람이나 공평하게 시간을 나누어 주시고 풍요로운 들녘처럼 생각도 여물어 가게 하소서 9월이 오면 인생은 늘 즐겁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슬픔 뿐이 아니라는 걸 알게하시고 가벼운 구름처럼 살게 하소서 고독과 방황의 날이 온다해도 사랑으로 살면 된다 하였으니 따가운 햇살과 고요히 지나는 바람으로 달콤한 삶과 향기를 더해 아름다운 생이게 하소서 진실로 어둔 밤하늘 빛나는 별빛과 같이 들길에 핀 풀꽃처럼 마음에 쌓여드는 욕심을 비워두시고 참으로 행복하기만 하소서 (게시기간 : 2009. 8.30.∼ 9. 5.) 643 발을 씻으며 김종목 발을 씻으며 문득 발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꽉 닫힌 구두 속에서 하루종일 견뎌낸 고마움을 생각한다. 얼굴이나 손처럼 밝은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은 것도 만져보고, 그러나 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새끼처럼 껴안고 구두의 퀘퀘한 어둠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진 곳에서 흑진주 같은 까만 땀을 흘리며 머리와 팔과 가슴과 배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구나. 별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발아 저녁마다 퇴근하여 씻기도 귀찮아했던 발아 너의 고마움이 왜 뒤늦게 절실해지는 걸까. 오늘은 발가락 하나하나를 애정으로 씻으면서 수고했다. 오늘도 고물차같은 이 몸을 운반하기 위하여 정말 수고했다. 나는 손으로 말했다. 손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게시기간 : 2009. 8.23.∼ 8.29.) 642 딸기 박홍점 딸기는 그냥 맨몸으로 산다 중심에 씨방 만들어 씨를 가두지도 않고 흩어져 있는 씨까지도 달다 터지지 않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나 한 번쯤 쨈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딸기의 붉고 여린 표면은 일종의 전략이라는 것을 딸기를 매만지는 손은 때로 경건해 보이기도 한다 열을 가해도 잘 풀어지지 않고 국자로 꾹꾹 눌러도 뱉어낸 수면 속에서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완강하고 질기다 꽃처럼 달콤했던 모습 다 허물어져도 쉽게 헐어버릴 수 없는 심지 하나 뼈의 단단함으로 숨기고 있었구나, 견디고 있었구나 맨몸으로 살아가는 오랜 습성은 딸기의 중심이다 (게시기간 : 2009. 8.16.∼ 8.22.) 641 그리움에 대해 김기만 기다리면 별이 된단다. 슬픔 한조각으로 배를 채우고 오늘은 쓸쓸한 편지라도 쓰자 사랑하면서 보낸 시간보다 외로웠던 시간이 많았을까 그대 뒷모습 동백꽃잎처럼 진하게 문신되어 반짝이는 내 가슴 구석 노을이 진다 슬프도록 살아서 살아서 슬픈 추억 한줌으로 남아 있는 사랑을 위해 눈감는 저녁 하늘 속에 별 하나가 흔들린다 사람의 뒷모습엔 온통 그리움뿐인데 바람이나 잡고 다시 물어 볼까, 그대 왜 사랑은 함께 한 시간보다 돌아서서 그리운 날이 많았는지... (게시기간 : 2009. 8. 9.∼ 8.15.) 640 살아 있다 난 이윤택 살아 있다, 난 아침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살아 있다, 공복의 담배를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살아 있다, 난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오늘이란 시간이 내게 할애해 줄 좋은 일을 생각한다 그래, 살아 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산책을 나간다, 긴 장마 사이 언뜻 비치는 한평 반 푸름을 위안 삼고 아파트 옆 개천 위로 둥둥 떠 밀려가는 저 찌꺼기들까지 아름답게 느끼려 한다 창을 열고 젖은 이불을 널어 말리는 사람들 모두 용케 살아 있다, 유리창을 닦고 전구를 갈아 끼우면서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매일 조금씩 불투명해지는 창일지라도 매일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들 살아 있다는 것이 즐거운 건지 쓸쓸한 건지 한때의 반짝임인지 어느 순간 맥없이 부서지는 오르간인지 잘 모른다, 알고 보면 가혹한 시간, 그러나 이 가혹함을 견디면서 살아 있다, 난 (게시기간 : 2009. 8. 2.∼ 8. 8.) 639 엉거주춤 김병호 허리를 비끗한 어머니가 끕끕한 더위를 버티지 못하고 대문을 꼭꼭 닫아걸고는 등목을 해 달라 하기에 남세스럽게 다 큰 자식을 부려먹는다며 퉁을 놓고 버티다, 못 이기는 척 수돗가로 따라 나섰다 길고 가파른 밭고랑을 써레질하던 강마른 소의 등허리 같기도 하고 뒤안에 감또개 떨군 단감나무 같기도 한 어머니의 엉거주춤한 뒷모습이 낯설어 물 한 바가지 끼얹고, 잠시 망설이는데 고목에 눌러 붙은 이끼처럼 어머니 몸에 핀 검버섯들 한때 처녀였고, 어머니였던 흔적들 그 흔적들 씻어 내려 서둘러 알뜨랑비누로 문지르는데 뜬금없이 고목에 핀 꽃처럼 피어나는 비눗방울들 어머니는 금세 봄꽃처럼 화사하게 부풀고 물줄기로 비누 거품을 날리자 고목은 다시 가을이 되는데 꽃이 피는 것보다 나무가 잎을 띄우는 것보다 아이의 붉은 잇몸을 뚫고 하얀 이가 솟는 것보다 어미된 목숨만큼 아픈 게 또 있을까 힘겹게 엉거주춤 앉은 어머니는 간지럽다며 연신 웃음만 삼키는데 김버섯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알뜨랑비누는 자꾸 미끄러지기만 하고 대신에 풀솜을 펴 놓은 듯 가볍게 둥실 뜬 구름이 건너 산 능성을 뭉개고 있었다. (게시기간 : 2009. 7.26.~ 8. 1.) 638 새벽 등산길에서 황인동 칡넝쿨과 등넝쿨이 서로 엉겨 뒹구는 걸 본다 나는 그 누구와 단 한번이라도 저토록 껴안아 본 적이 있는가 바람을 안고 위를 향해 올라가는 저 눈물겨운 모습 앞에서 비로소 아름답다 말하리라 서로의 몸이 길이 되고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저 뜨거운 넝쿨도 어둠에 발이 걸려 수십 번 넘어졌을 것이다 넘어질 때마다 길 하나 새로 생겼을 것이다 새벽을 달리면서 어둠 툭툭 털고 나면 케케묵은 나의 관념들이 방뇨한다 곧은 줄기가 햇빛을 더욱 많이 받는다는 걸 새벽 등산길은 내게 넌지시 일러준다 아, 내 몸에 철철 수액이 흐른다 (게시기간 : 2009. 7.19.~ 7.25.) 637 텃밭에서 이선화 담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두어 뼘 텃밭에 행여 도둑이라도 들까봐 호미로 가장자리에 굵은 선 하나 그어두었습니다 그도 경계려니 허락없이 넘나들면 곤란하겠다 싶어 다시 그 위에 돌멩이 몇 개 쌓아두었습니다 돌아보니 내 하는 짓 우스워 모두 허물고 지웠습니다 갈수록 살림 줄이는 일보다 마음 줄이는 일이 더 어려우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게시기간 : 2009. 7.12.~ 7.18.) 636 걸음12 하순희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불 밝혀 남아있는 일이라고 출근길 우산 속에서 뇌어보는 비 오는 날 (게시기간 : 2009. 7. 5.~ 7.11.) 635 나도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홍신자 흔히 노력하는 자만이 성공한다고 말하지 그래, 노력하는 자만이 진정한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거야. 희야, 엄마는 네가 욕심을 가졌으면 해. 자신의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 말고 자신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진정한 욕심 말이야. 진정한 욕심은 자신의 본모습을 알 수 있게 하지. 나무인지 꽃인지 풀인지 어떤 향기로 세상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게 해. 아직도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진정한 욕심이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기 때문이야. (게시기간 : 2009. 6.28.∼ 7. 4.) 634 장마철 ― 낙동강 6 윤일현 밤새 퍼부은 비로 학교 앞 샛강 넘치는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결석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누나를 졸라서 사카린물 풀어먹인 밀이나 콩 볶아 어금니 아프도록 씹으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거나 배 깔고 엎디어 만화책을 볼 때면 눅눅하고 답답한 여름장마도 철부지 우리에겐 즐겁기만 했고 아버지 수심에 찬 주름진 얼굴도 돌아서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 형과 나는 은밀한 눈빛으로 내일도 모레도 계속 비가 내려 우리 집만 떠내려가지 말고 샛강물은 줄지 않기를 낄낄거리며 속삭이곤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간절히 쉬고 싶을 때는 샛강 넘치는 꿈을 꾼다 (게시기간 : 2009. 6.21.∼ 6.27.) 633 잡초는 김종태 춥다 덥다 울지 않는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조르지 않는다 못생겼다 가난하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난초를 꿈꾸지 않는다 벌 나비를 바라지 않는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는 것을 버거워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주어진 것만으로 억척으로 산다 버려진 곳 태어난 곳에서 모질게 버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 살기 위해 먹는 수단은 언제나 신성하다 뜯기고 밟히고 채이는 것은 존재의 숙명 살아 있다는 것은 은혜이고 죽는다는 것은 섭리이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섭리를 따를 뿐이다. (게시기간 : 2009. 6.14.∼ 6.20.) 632 꽃 진 자리 장지성 한 송이 꽃잎에도 내홍이 없었으랴 그 다툼, 시샘들은 지천으로 풀어 놓고 아 진정 꽃들이 아름다운 것은 낙화가 있기 때문이다. (게시기간 : 2009. 6. 7.∼ 6.13.) 631 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 이어령 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 다만 숟가락 두 개만 놓을 수 있는 식탁만한 집이면 족합니다. 밤중에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구름이 보이는 구멍만 한 창문이 있으면 족합니다. 비가 오면 작은 우산만 한 지붕을 바람이 불면 외투자락만 한 벽을 저녁에 돌아와 신발을 벗어 놓을 때 작은 댓돌 하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내가 살 짓을 짓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맞이할 때 부끄럽지 않을 정갈한 집 한 채를 짓게 하소서 그리고 또 오래오래 당신이 머무실 수 있도록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집을 짓게 하소서. 기울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집을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는 집을 내 영혼의 집을 짓게 하소서. (게시기간 : 2009. 5.31.∼ 6. 6.) 630 즐거운 소음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게시기간 : 2009. 5.24.∼ 5.30.) 629 아내의 꽃 김경진 꽃들은 얼굴을 마주볼 때 아름답다 술패랭이꽃이 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아내의 얼굴에 핀 기미꽃을 본다 햇볕의 직사포를 피하기 위해 푹 눌러쓴 모자에도 아랑곳없이 자꾸 얼굴에 번져가는 아내의 꽃, 사시사철 햇볕이 없을 수 없듯 피할 수 없이 아내의 얼굴엔 피어난 꽃이 늘어간다 아내는 몸 꼭대기에 꽃밭을 이고 다니는 것이다 기미꽃, 죽은깨꽃, 주름꽃 다양한 아내의 꽃밭에서 그래도 볼 위에 살짝 얹어진 웃음꽃이 가끔씩 위안으로 피어난다 술패랭이꽃들이 몸을 부비는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아내의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항상 내 곁에 있다고 (게시기간 : 2009. 5.17.∼ 5.23.) 628 나무처럼 산처럼 이오덕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버들강아지도 할미꽃도, 참꽃이 필 때 찾아와서 빨랫줄에 앉아 재재골 재재골 뭐라고 인사하던 그 오랜 옛 친구 제비들도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들었던 노래가 “보리밭의 종달새 봄이 왔다고”로 시작되는 윤복진 선생의 동요였다. 그 노래는 내가 아기로 누님 등에 업혀 다닐 때 누님이 불러주시던 노래였다. 그런데 이제는 봄이 와도 종달새 소리를 들을 길이 없다. 나를 키워주고 내 영혼이 자리잡을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그 산천의 꽃들이며 새들이며 물고기들이 다 사라진 이 적막강산에, 그래도 진달래 참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서 해마다 봄이 와서 진달래 붉은 산을 쳐다보면 눈물이 나는 것이다. (게시기간 : 2009. 5.10.∼ 5.16.) 627 어머니 - 기침소리 1 김석준 지금은 새벽 두시 한 편의 불후 명작을 쓰기 위해 밤을 새우고 있다 머리에 떠오른 절묘한 한 구절의 어휘 잔기침이 몇 번 들리더니 이내 가래 끓는 소리가 그렁그렁 난다 외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어머니는 해소를 앓고 계신다 곤한 잠을 주무시다 터진 기침에 잠드시지 못하는 어머니 외손자들 성화에 늘어난 흰 머리 깊게 패인 주름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장가못간 아들 걱정이 기침을 키우셨나보다 앞니 다 빠지셔도 병원 한 번 안가시고 무릎에 물이 차도 파스 한 장이면 그만이신 어머니 내 머리 속에 떠오른 한 구절의 아름다운 시는 어머니의 거친 기침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고 있다 산산이 흩어지고 있다 (게시기간 : 2009. 5. 3.∼ 5. 9.) 626 연등 정우영 내 몸이 아프고서야 비로소 목숨 귀한 줄 알다. 흘리듯 지나친 숱한 생명들, 꽃, 풀, 새, 나무, 물고기…… 그리고 사랑까지 어느 것 하나 새삼 소중치 않은 것 없다. 내 숨구멍에서 하! 하는 탄식음 터지자 내 몸 저 깊은 곳까지 한 우주가 팽창한다. 병이 내게로 온 까닭은 이렇듯 내 마음자리에 맺히는 인연마다 연등 하나씩 골고루 걸어두라는 뜻인가. (게시기간 : 2009. 4.25.~ 5. 2.) 625 어머니와 함께한 산책 양선희 나를 위문오신 어머니와 약수가 나는 산을 오른다 내가 모르는 풀들과 어머니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딸에게 보여줄 할미꽃을 뿌리째 뽑는다 어머니는 할미꽃의 뿌리를 끊어 무덤가에 던지신다 뿌리는 내년에도 꽃을 피워야지 흙냄새만 맡아도 뿌리는 뻗으니까 나를 살릴 흙이 있나 두리번거리는 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읽으신 어머니는 가시밭이든 자갈밭이든 어디든 뿌리는 내리면 다 살게 돼 있어 거기가 내 자리다 믿으면 약초를 뜯으며 어머니는 부유하는 내 생에 약손을 대신다 (게시기간 : 2009. 4.19.~ 4.25.) 624 아버지 이형권 보리밭에 일렁이는 바람이었다가 나락밭에 서걱이는 빗방울이었다가 만대산에 내려앉은 구름이었다가 무지랫봉에 떨어지는 노을이었다가 박둑거니 솔밭 길을 걸어오는 햇살이었다가 둔주포 장터에서 돌아오는 저녁 불빛이었다가 뒤란 대숲 속에 잦아드는 기침소리였다가 알 듯 모를 듯 이어지는 잠꼬대였다가 배나무골 산밭 흙 속에 앉아 계시네. 푸짐한 달빛 되어 앉아 계시네. (게시기간 : 2009. 4.12.~ 4.18.) 623 꽃들 문부식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감옥안에 핀다고 한탄하지 않고 갇힌 자들과 함께 너희들 환한 얼굴로 하루를 여나니 간혹 담을 넘어 들어오는 소식들은 밝고 짐승처럼 갇혀도 우리들 아직 인간으로 남아 오늘 하루 웃으면서 견딜 수 있음을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감옥 안에 핀다고 한탄하지 않고 갇힌 자들과 함께 너희들 환한 얼굴로 하루를 여나니 (게시기간 : 2009. 4. 5.~ 4.11.) 622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게시기간 : 2009. 3.29.~ 4. 4.) 621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물,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어딘가로 또 흘러가네. (게시기간 : 2009. 3.22.~ 3.28.) 620 관계 손현숙 도둑맞아 어수선한 내 집에 앉아 나는 왜 그 흔한 언니 하나 없는 걸까, 무섭다는 말도 무서워서 못하고 이불 둘둘 말아 쥐고 앉아서 이럴 때 느티나무 정자 같은 언니 하나 있었으면. 아프다고, 무섭다고, 알거지가 되었다고 안으로 옹송그리던 마음 확 질러나 보았으면. 언니, 부르는 내 한마디에 물불 가릴 것 없이 뛰어와 주는 조금은 무식한 아무 때나 내 편인. (게시기간 : 2009. 3.15.~ 3.21.) 619 사친 신사임당 산 첩첩 내 고향 천리건마는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 위로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게시기간 : 2009. 3. 8.~ 3.14.) 618 어찌 하려고요 권경애 그대여 봄, 하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대가 입술을 오므려 봄이라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 입맞추고 가 버리면 어찌 하려고요, 아니 누군가 입맞춤하고 달아난 뒤 아, 하고 놀라는 순간에 입 속으로 씨앗 하나 들어와 싹을 틔우면 어찌 하려고요, 아니 아니에요 꽃 핀 다음에 이내 져 버리면 그 기나긴 정적을 다 어찌 하려고요. (게시기간 : 2009. 3. 1.~ 3. 7.) 617 광화문 한광구 광화문이 보이고 햇살이 비늘처럼 쏟아집니다. 충무공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봄을 여는 바람이 불고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대- 한- 민-국 만세소리, 환호소리, 탄식과 아우성이 붉게 푸르게 유리창마다 반짝입니다. 역사의 웃음소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햇살로 쏟아져 내리는 이 거리에 살고 있습니다. (게시기간 : 2009. 2.22.~ 2.28.) 616 사랑이 지나가면 이영훈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게시기간 : 2009. 2.15.~ 2.21.) 615 국화빵 유현숙 지하철 출입구 한구석에 겨울 장승처럼 간이 노점의 국화빵틀이 서 있다 과거의 모서리 몇 군데가 깨진 빵틀만큼 오래된 중년의 남자가 낡은 기억들을 몇 번씩 뒤집으며 노릇노릇 구워 낸다 베어 물 것도 없이 한 입 크기의 백동전 만한 추억들이 두어 줄 좌판 위에 널려 있고 뼈가 삭는 고민도 없이 뒤집었던 젊은 날의 가책들 위에 생전 잊혀지지 않을 상처 같은 팥 알갱이들이 밀가루 반죽 위에 듬뿍 얹혀진다 바람난 계집처럼 몸 뜨겁게 달은 화덕은 이제야 속죄의 문신을 새기듯 흩어진 부끄럼들을 버무려 또렷이 박아낸다 누군가의 장식이면서 상처이기도 한 국화꽃 문신을 꾹꾹 찍어낸다 골목 끝에서 빵틀처럼 낡은 세월 하나가 불어오고 있다 (게시기간 : 2009. 2. 8.~ 2.14.) 614 봄은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듯이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게시기간 : 2009. 2. 1.~ 2. 7.) 613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게시기간 : 2009. 1.25.~ 1.31.) 612 나무의 정신 강경호 죽은 나무일지라도 천년을 사는 고사목처럼 나무는 눕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서재의 책들은 나무였을 적의 기억으로 제각기 이름 하나씩 갖고 책꽂이에 서 있다. 누렇게 변한 책 속에 압축된 누군가의 일생을 나는 좀처럼 갉아먹는다. 나무는 죽어서도 이처럼 사색을 한다. 숲이 무성한 내 서재에서는 오래 전의 바람소리, 새소리 들린다. (게시기간 : 2009. 1.18.~ 1.24.) 611 폭설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튼날 아침 눈이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웨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게시기간 : 2009. 1.11.~ 1.17.) 610 사는 법 홍윤숙 기다려야 해 네거리 신호등 빨간 불 앞에선 가던 길 멈추고 한숨 돌리고 잊었던 하늘 한 번 다시 보고 흘러내린 행낭 고쳐 메야 해 먼 산마루엔 분홍빛 구름 한 점 돌아가는 모퉁이엔 수묵 빛 어둠 남은 여정 자욱이 찬비 뿌리는 한 시대 도상에 함께 젖는 우리들 보아요 누구도 이 비를 피해가지 못하는 운명의 겨울 추운 몸 서로서로 살 비비고 남은 불 조금씩 나누어 지펴요 어둠 속에 뿌리들 서로 엉켜요 (게시기간 : 2009. 1. 4.~ 1. 10.) 609 새해의 소원 안국훈 한해가 저물고 새벽은 질주합니다 일에는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이 있고 지나간 일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마냥 망설일 수만 없어 누군가 언젠가는 해야 합니다 닭이 울어 새벽이 오는 게 아니듯 달력이 바뀐다고 새해가 오는 게 아닙니다 새해는 지난 미련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겁니다 잊을 건 잊고 용서할 건 용서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으로 약속해야 합니다 새해에 뜨는 해는 당신의 큰 뜻입니다 새해에 부는 바람은 당신의 힘찬 기운이고 새해에 비는 소원은 당신의 간절한 속마음입니다 새로운 날을 맞아 뜻을 세우고 기운을 내면 가슴엔 꽃향기 같은 온기가 흐릅니다 새해는 당신의 여생 중 가장 젊은 날입니다 부디 꿈을 이루소서 하루가 소중한 날 되십시요 정녕 올해는 당신의 해가 되십시요 (게시기간 : 2008. 12.28.~2009. 1. 3.)

3-13. 화장실에서 읽는 시 2009 년   끝.       메인메뉴로  이동  화장실에서 읽는 시 메인 메뉴로 이동